로이터연합뉴스독일이 기상관측 이래 가장 뜨거운 여름을 보내면서 그동안 사치품 취급을 받던 에어컨 사용이 생활 문제를 넘어 정치 쟁점으로까지 번지는 모양새다. 이동형 제품에 수요가 몰려 품귀가 빚어지는 사이, 극우 정당은 환경 규제가 사람을 죽였다고 공세를 폈고, 녹색 진영은 냉방 확대가 답이 아니라고 맞섰다.3일(현지시간) 독일기상청(DWD)에 따르면 지난 6월 29일 동부 브란덴부르크주 나이세뮌데에서 41.7도가 관측됐다.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기온으로 이틀 전 작센안할트주 뫼케른드레비츠에서 나온 41.5도 기록을 곧바로 갈아치웠다. 베를린도 39도까지 올라 경찰이 물대포 차량을 동원해 시민에게 물을 뿌렸고, 라이프치히에서는 노면전차 선로가 녹아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올해 유럽의 폭염은 5월 하순부터 시작돼 평년보다 10~15도 높은 기온이 이어졌다.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와 세계보건기구가 지원하는 사망률 감시망 유로모모 집계로 6월 말 유럽의 초과 사망자는 1만 명을 넘었고 이 가운데 9000명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층이었다.
더위를 견디기 어려웠던 이유는 냉방 설비가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독일 가정의 고정식 에어컨 보급률은 약 6%에 그친다. 유럽 평균(20~23%)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집계로 지난해 유럽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23%였는데 중국(79%)이나 일본(93%), 미국(90%)과는 격차가 크다.
독일 주택가에서는 대부분의 가정이 차광막을 내리고 창을 가리는 방식으로 여름을 나고 학교와 병원, 지하철에도 냉방이 충분치 않아 일부 지하철은 창문을 열고 달린다.
에어컨 보급률이 낮은 데는 건축 규제가 자리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주택의 약 40%가 1945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외관 보존 규제를 받는다. 실외기를 다는 일이 건축물 외관 변경으로 간주돼 행정 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웃 동의와 소음 문제까지 넘어야 한다. 여기에 전력 소비와 냉매 누출, 도시 열섬을 이유로 냉방 확대에 신중했던 환경 의식이 더해지면서 자연 환기와 단열, 차양이 폭염 대응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올여름 그 원칙이 무너졌다. 허가와 실외기가 필요 없는 이동형·창문형 제품으로 수요가 쏠리면서 품귀 현상이 나타났다. 독일 전자상거래 채널에서 중국 가전업체 메이디의 에어컨 매출은 5월 기준으로 1년 전보다 37% 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향 출하량은 108% 뛰었다.
메이디의 이동형 제품은 일부 유통 채널에서 물량이 동났고 중고 거래가가 신제품 가격을 웃도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일본 미쓰비시전기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수요가 몰려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논쟁은 곧 정치로 옮겨붙었다.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극우 정당 독일대안당(AfD)은 기후 히스테리가 에어컨 설치를 가로막아 폭염 사망자를 늘렸다고 주장하며 건축 규제 완화를 요구했다. 반면 녹색 진영은 도심 녹지 확충과 재생에너지 확대가 먼저라고 맞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여름에 부채를 쓰면 녹색당이고 에어컨을 쓰면 극우냐는 풍자가 퍼졌다. 비슷한 대립은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내년 4월 대선을 앞둔 프랑스에서는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이 학교와 병원에 에어컨을 대규모로 설치하겠다고 공약했고, 벨기에에서는 좌파 성향 지방정부가 최고의 에어컨은 나무라며 도시 녹화를 앞세우자 우파가 비과학적 환경주의라고 반박했다.
공방이 커질수록 정작 폭염의 원인과 피해 격차는 뒤로 밀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BBC는 냉방 설비를 갖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실내 노동자와 야외 노동자 사이의 냉방 격차가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불평등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짚었다.
세계보건기구 유럽사무소는 병원과 요양시설, 학교, 대중교통처럼 취약계층이 이용하는 시설에는 냉방을 적극 확대하되 도시 녹지와 건물 단열 개선 같은 장기 대책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