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 엑스(X)에 지난 4일 올라온 가브리엘 아탈 전 프랑스 총리 비방 글. 프랑스 유력 신문 리베라시옹과 지역지 우에스트 프랑스 등의 디자인을 본딴 가짜 신문 1면들을 퍼뜨리고 있다. 아탈이 마약 밀매 세력과 연계됐으며 여성 혐오를 지원해왔다는 식의 가짜뉴스다. 엑스 갈무리지난달 말부터 프랑스 소셜미디어에는 내년 프랑스 대선의 유력 주자인 라파엘 글뤽스만 유럽의회 의원(사회민주 동맹)을 비방하는 영상들이 나돌았다. 영상 속 인공지능(AI) 합성 음성은 글뤽스만의 파트너 레아 살라메가 르몽드 편집국에 “글뤽스만에 유리한 기사를 싣는 대가로 5만유로(8200만원)를 제안했다”고 주장한다. 언론그룹 ‘미디아파트’ 창립자인 에드위 플라넬을 흉내낸 목소리도 등장해 “이런 관행은 정직한 저널리즘의 원칙을 훼손한다”고 꾸짖는다.
이 모든 내용은 가짜로 드러났다. 러시아 정부와 연계된 정보 조작 그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판해온 좌파 정치인을 겨냥해 허위 동영상을 만든 것이다. 글뤽스만은 “러시아 정권이 나를 더럽히기 위해 완전한 거짓말을 바이럴(온라인 유포)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내년 4월 대선을 8개월 앞둔 프랑스가 러시아발 ‘가짜뉴스’에 시달리고 있다. 글뤽스만 의원 말고도 중도 우파 성향 에두아르 필리프 전 총리, 가브리엘 아탈 전 총리 등이 잇따라 공작 타깃에 올랐다. 러시아와 친한 극우 진영만 피해에서 비켜나는 중이다.
‘여론 공작’ 먹잇감 된 대선후보들
파리 검찰청은 6일(현지시각) 성명을 내어 “외국 세력의 이익을 위해” 글뤽스만을 겨냥한 조작 이미지가 유포된 사건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검찰 사이버범죄수사대가 사건의 구체적인 배후·의도 등을 조사한다. 보안 당국은 지난 주말께 여론 조작 정황을 파악해 글뤽스만 본인에게 알린 상태다. 글뤽스만은 지난 4일 입장문에서 “프랑스 국방·국가안보사무국(SGDSN)은 내가 ‘스톰-1516 그룹’의 공격 대상이며, 이 그룹은 러시아군 정보총국(GRU)의 직접 지휘를 받는다고 확인해줬다”고 전했다.
이어 아탈 전 총리도 5일 안보사무국으로부터 자신이 “러시아 정부와 연계된 기관들”의 표적이 됐음을 통보 받았다”고 밝혔다. 친러시아 정보 조작 그룹 ‘마트료쉬카’는 리베라시옹·프랑스24 등의 온라인 기사 틀을 베껴, 아탈이 “파킨슨병 징후를 보인다”는 내용의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그의 아버지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아들에게 마약 제국을 물려줬다”는 황당무계한 주장까지 실렸다. 필리프 전 총리 역시 지난달 말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다”는 헛소문에 시달린 바 있다. 당국은 스톰-1516의 소행으로 봤다.
지난달 31일부터 러시아 정보총국(GRU) 산하 ‘스톰-1516 그룹’이 소셜미디어에 퍼뜨린 라파엘 글뤽스만 유럽의회 의원 비방 영상. 그의 파트너이자 프랑스2 방송 뉴스 진행자인 레아 살라메가 르몽드, 리베라시옹 등에 5만유로짜리 기사 청탁을 했다는 가짜뉴스다. 르파리지앵 유튜브 영상 갈무리“언론사 베낀 누리집 141개”
스톰-1516과 마트료쉬카는 온라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친러시아 여론 공작단이다. 르피가로는 안보사무국 산하 허위정보조사기구(비지눔) 최근 보고서를 인용해, 러시아 정보총국 간부 출신인 유리 호로셴키가 스톰-156에 “자금을 대고 작전을 조정한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로 망명한 전직 미국 경찰관 존 마크 두건도 공작을 지휘한다. 마트료쉬카의 경우 ‘윗선’이 누구인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크렘린 지지세력이 주도하는 것으로 비지눔은 추정한다.
이들의 공작은 인공지능으로 만든 가짜 기사나 딥페이크 이미지를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언론사 로고를 박은 온라인 기사와 매체 디자인을 베낀 신문 1면 사진, 영화 포스터, 정부 문서, 영수증 등이 위조된다. 특히 기사는 신문사 누리집을 본딴 가짜 누리집에 실린다.
예컨대 스톰-1516은 지난해 12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지능지수(IQ)는 89”라는 제목의 글을 르피가로 기사인 것처럼 퍼뜨렸다. 프랑스 베에프엠 티브이 닷컴(bfmtv.com) 주소의 ‘짝퉁’인 베에프엠 티브이 넷(bfm-tv.net)도 운영 중이다. 사이버 보안회사 ‘레코디드 퓨처’는 지난해 9월 기준 스톰-1516이 만든 프랑스어 가짜 누리집이 141개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허위 콘텐츠는 일회성으로 대량 생성된 소셜미디어 계정들이 퍼나른다. 공작 그룹이 인플루언서들에게 가상 자산 등으로 수고비를 주고 이를 게시하도록 사주하기도 한다. 서방의 친러시아 인사나 러시아로 이주한 서방 국가 시민들이 여기에 동원된다. 비지눔은 스톰-1516이 이런 식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엑스(X)에서 수백만, 심지어 수천만의 조회수를 올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6일 영상 연설을 하는 모습. 타스 연합뉴스‘친러’ 극우만 공격 피했다
이들의 활동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시작됐다. 처음에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네오 나치·마약 중독자·동성애자”라거나, “유럽연합(EU) 자금을 빼돌려 나치 선전가 요제프 괴벨스의 옛 저택을 사들였다”는 식의 가짜 뉴스를 돌렸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자 공격 좌표가 서유럽으로 바뀌고 있다. 유럽연합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주도하는 정치인들이 자국 내 지지를 잃도록 비방하는 것이다. 리베라시옹은 비지눔을 인용해 “친러시아 공작 그룹은 특히 유럽 지도자와 그 주변 인사들을 직접 겨냥하며, 특히 선거 기간에 집중한다”고 썼다.
실제로 최근 공격 당한 프랑스 정치인은 푸틴이 벌인 전쟁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유럽연합 결속을 호소해온 이들이다. 글뤽스만 의원은 지난해 10월 유럽의회 연설에서 푸틴을 겨냥해 “폭군에게 양보하면 평화를 얻는 게 아니라 그의 식욕을 키우고 다음 침략만 앞당긴다”고 맹비난한 바 있다.
반면 좌우를 가리지 않는 러시아 공작은 극우 국민연합(RN)은 건드리지 않고 있다. 국민연합은 전신인 국민전선(FN) 시절부터 크렘린과의 유착 의혹을 받던 정당이다. 국민연합 대선후보인 마린 르펜은 국민전선 대표이던 2014년 러시아 은행에서 정치자금 940만유로(154억원)를 대출받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무력 점령한 직후여서 유럽 정가에서 논란이 일었다. 이듬해 그의 아버지이자 국민전선 초대 대표인 장마리 르펜은 “백인 세계를 구하려면 러시아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연합은 지금도 프랑스 원내 정당으로 드물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반대한다.
아탈 전 총리는 성명에서 “이런 공격은 또 벌어질 것이다. 매번 러시아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후보들을 겨냥할 것”이라며 “당연히 국민연합 지도부는 표적이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