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 주도
'반도체 핵심 축' 과학단지 부작용 등 연구
연구 총괄 맡은 쉬진위 국립대만대 교수
"책임 있는 비판, 산업 지속가능성 높여"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한국에도 시사점
편집자주
대만은 세계가 주목하는 ‘반도체 성공 신화’를 썼다. 하지만 화려한 성공 뒤에는 양극화를 비롯한 그늘도 짙다. 한국도 전국에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대하며 대만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한국일보는 대만 현지 취재를 통해 반도체 강국의 두 얼굴을 살펴봤다.
7월 21일 대만 지룽항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대만의 6월 수출액은 953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 동월보다 59.4% 늘어 증가 폭도 전월의 47.2%보다 커졌다. 지룽=EPA 연합뉴스반도체 강국 대만이 46년 만에 '성장의 비용'을 따져보는 연구에 착수했다. 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 지원을 받은 연구진이 신주과학단지를 비롯한 대만 내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이후 발생한 각종 부작용을 4년에 걸쳐 조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타이베이 인근 신주과학단지는 1980년 출범한 대만 최초의 과학단지로 반도체 산업의 핵심 축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TSMC 본사도 이곳에 있다.
반세기에 걸쳐 이룩한 '반도체 성공 신화'의 이면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과학단지를 조성하고 확장해온 정책기관이 직접 연구를 주도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인공지능(AI)발 반도체 호황으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대만 정부는 성장 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는지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연구는 지난 5월 시작됐으며, 연구명은 '과학단지와 도시·지역 발전에 관한 50년 정책 검토 및 영향 평가'다. 연구는 과학단지 확장이 지역사회·노동자 및 가정·환경을 어떻게 바꿨는지 종합적으로 추적한다. 공장과 산업 인력의 유입이 주택 가격과 임대료, 교통과 공공 서비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과학단지 확장에 따른 물·전력·토지 이용과 비용이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되는지 등이 연구 대상이다. 반도체 주도 성장이 소득·자산·사회적 지위의 격차를 얼마나 키웠으며, 고강도 업무가 결혼·출산·돌봄, 가족 관계를 어떻게 바꿨는지도 조사한다.
쉬진위 국립대만대 지리학과 교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의 지원을 받아 신주과학단지를 비롯한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의 사회·환경적 부작용을 조사하는 연구를 총괄하고 있다. 쉬 교수는 "책임 있는 비판은 산업을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본인 제공한국일보는 이번 연구를 총괄하는 쉬진위 국립대만대 지리학과 교수를 7월 21일 타이베이의 국립대만대에서 만났다. 대만을 비롯한 후발 산업국가들의 첨단기술 산업 및 지역 개발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쉬 교수는 대만 과학기술부 우수연구상, 교육부 학업상 등을 다수 수상한 저명 학자다.
쉬 교수는 이번 연구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반도체 산업은 기술 또는 경제 문제로 다뤄지지만, 칩은 기술만으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 훨씬 폭넓은 물질적·사회적 인프라에 의존한다"며 "투자액과 생산가치, 기술 역량만 연구한다면 이야기의 절반만 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쉬 교수는 "대만에서 반도체 산업은 워낙 중요하기에 이에 대한 비판은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며 "책임 있는 비판은 반산업적인 게 아니라 이 산업을 장기적으로 사회적·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단지의 사회적 비용을 연구하는 시도는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 중인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반도체·피지컬 AI·데이터센터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로 내걸고 대규모 투자와 부지·전력·용수 확보에 총력을 쏟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문제와 맞닥뜨릴 수 있다. 실제로 이번 연구 대상에는 주거와 교통, 돌봄, 환경, 지역사회의 의사결정 참여까지 산업적 측면뿐 아니라 초기 단계부터 함께 고민해야 할 사안이 대거 포함됐다.
쉬 교수는 특히 "공장 건설과 지역 균형 발전은 서로 다른 목표"라고 강조했다. 제조시설만 지방에 배치하고 연구개발과 설계, 기업의 핵심 의사결정 기능을 수도권에 남겨둔다면 지방은 물과 전력을 소비하고 환경 부담을 감당하는 생산기지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쉬 교수와의 일문일답.
그래픽=박종범 기자-다른 나라에선 대만의 반도체 성공 신화를 연구하는데, 정작 대만 정부는 과학단지의 사회적 비용을 다루는 연구를 장기간 지원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논의가 시작된 것은 약 1년 반 전이다. NSTC 내부에서 '대만이 과학단지를 성공적으로 키웠지만 주변 주민들의 불만도 적지 않다.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NSTC가 나에게 연구팀 구성을 요청했고 7개 세부 주제와 관련해 연구자를 모았다."
대만은 1973년 공업기술연구원(ITRI)을 설립하고 첨단기술 기반의 연구와 수출산업 육성에 나섰다. 1980년 북부 신주과학단지를 출범시킨 뒤 반도체 설계 및 제조업체, 장비·소재 기업은 물론, 대학과 연구기관이 집적되면서 신주과학단지와 주변 지역은 대만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그 영향권은 타이베이 남쪽으로 이어지는 타오위안과 먀오리까지 확장돼 '대실리콘밸리'로 불린다. 신주과학단지의 포화로 대만은 중부와 남부에도 권역별 과학단지를 조성했다.
그래픽=박종범 기자-과학단지 확장 과정에서 물·전력·토지 이용이 주민에게 미치는 영향도 조사하는 건가.
"물과 전력이 반도체 공장에 계속 공급되는 한 인프라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정적인 공급은 대규모 공공투자와 지역 간 자원 이전, 누구에게 우선 공급할 것인지에 관한 정치적 결정에 따른다. 물의 경우 팹(반도체 생산 공장)이 얼마나 소비하는지만 따져선 안 된다. 가뭄 때 누가 물 사용량을 줄일지, 농업과 일반 가정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재생수와 관로·저수지·해수담수화 시설의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전력도 마찬가지다. 전체 발전량뿐 아니라 공장 증설에 따라 송전선과 변전소가 어디에 들어서는지, 전력망의 안정성과 에너지 전환 비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봐야 한다. 현장조사와 환경 모니터링을 통해 과학단지 주변의 환경 오염 가능성과 주민들의 신체·정신 건강에 미치는 위험도 살필 예정이다."
반도체 기업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도 연구 대상이다. 연구진은 높은 급여와 성과급이라는 보상 속에서 노동자들이 장시간 근무와 상시 대기, 성과 압박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자발적 순응'이 발생하고 있다고 본다. 직원들이 장시간 일하면서 배우자가 육아와 가사를 사실상 전담하게 되는 '유사 한부모 가정' 현상도 세밀하게 살핀다.
7월 23일 대만 신주과학단지의 TSMC 연구개발(R&D) 센터. 신주=신은별 기자-유사 한부모 가정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사 한부모 가정은 형식상 부모 모두가 존재하지만 반도체 회사 직원이 극도로 장시간 동안 일하게 되면서 배우자가 육아와 가사 대부분을 떠안는 가정을 가리킨다.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기업에 헌신하지만 그런 노동은 직원 건강과 부부관계, 가정 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도체 산업 종사자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 배우자가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에 머물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엔지니어 직군에 남성이 많다 보니 여성이 돌봄을 맡는 사례가 많다. 신주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주커마마'(신주과학단지 엄마)로 부른다."
대만 행정원 주계총처(통계 당국)는 5월 29일 대만의 2026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5,610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AI 관련 수요와 반도체 수출에 힘입어 1인당 GDP 등 거시 지표는 좋아지고 있지만, 성장의 과실이 일부 기업과 직업군, 자산가 등에만 집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이번 연구의 핵심 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만이 'K자형 경제'1라고 생각하나.
"그런 측면이 있다. 양극화는 소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K자의 위로 향하는 선에는 TSMC 등 선도 반도체 기업과 주주, 고숙련 엔지니어, 반도체 호황의 영향으로 생겨난 부동산 부자 등이 속한다. 아래로 향하는 선에는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와 세입자, 청년, 비핵심 제조기업과 소상공인, 소득이 늘지 않은 채 생활비만 증가한 주민들이 있다. 소득은 주택 구입에 영향을 주고, 집값은 결혼과 출산에 영향을 준다. 대만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오랫동안 '형평성을 동반한 성장'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대만에서도 불평등이 중요한 화두가 됐다."
-한국도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나.
"공장을 건설하고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것과 지역균형발전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대규모 팹이 들어선다고 그 지역에 자생적인 혁신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제조시설만 지방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 연구개발과 설계, 의사결정 기능도 함께 분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은 공장과 물·전력 수요, 환경 부담만 떠안고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기능은 수도권에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호남지역에 팹을 짓는다고 해서 그 지역에 혁신 시스템이 저절로 구축되진 않는다. 종합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쉬진위(오른쪽에서 네 번째) 국립대만대 지리학과 교수를 비롯해 신주과학단지 등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의 사회적 비용을 조사하는 연구진이 신주과학단지 내 과학박물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본인 제공2026 타이완 리포트
- ① <1> 반도체 강국의 명암 : 양극화 덮친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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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연봉 아빠 뒤엔 독박 육아"… 대만, '반도체 신화' 그늘 들여다본다
1 'K자형 경제'경제 회복 및 경제 성장의 성과가 계층, 산업, 기업 등에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리는 양극화 현상. 한쪽은 상승하고, 다른 한쪽은 하락하는 흐름이 알파벳 'K' 모양과 비슷하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