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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하며 발언하고 있다. 2026.8.6 |
| ⓒ 연합뉴스 |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고, '주적' 대신 '위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제안이 우리 사회의 해묵은 논쟁을 다시 소환했다. 상호 적대적 언어를 자제하고 북한의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약칭 '조선'을 사용함으로써 평화공존의 계기를 마련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남북한 공식 명칭 불러주기'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일이라며, 선의로 시작한 언어의 변화가 정쟁에 휘말려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적 신뢰 구축을 위해 용어를 바꾸자는 통일부 장관과 그 변화가 초래할 국내 정치적 비용을 우려하는 대통령의 신중론이 마주한 셈이다. 이 논쟁은 대외적 신뢰 구축과 대내적 정당성 확보라는 두 국가적 과제가 충돌하는 우리의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호칭 변경, 충분히 검토할 가치 있어
사실, '주적'과 '위협'은 같은 층위의 개념이 아니다. '적'은 특정 행위자나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지만, '위협'은 그 행위자가 보유한 능력과 의도, 행동이 초래하는 위험을 평가한 결과다. 따라서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규정을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표현으로 전환하는 것은 단순한 용어 교체가 아니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적으로 규정하는 안보관에서, 구체적인 능력과 행동을 기준으로 위험을 판단하는 안보관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게다가 국제 정치에서 호칭은 단순한 표현의 선택이 아니다. 상대를 무엇이라 부르는가는 그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알리는 정치적 신호다. 북한을 '조선'으로 부른다고 해서 북한 체제의 모든 가치와 행동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한을 적대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대하겠다는 최소한의 신호는 될 수 있다. 언어가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적대의 언어만으로 평화를 논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호칭 변경은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정책(Ostpolitik)이 대표적인 사례다. 브란트 이전의 서독은 자신만이 독일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독점적 대표권을 주장했고, 이를 토대로 동독을 승인한 국가와 외교 관계를 제한하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브란트 정부는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 즉, '다가섬을 통한 변화'를 선택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통해 서독은 두 국가의 현실을 인정하되, 서로를 외국으로 보지 않는 민족적·헌법적 특수관계를 유지했다. 현상을 인정하는 것이 현상을 영구화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평화적으로 변화시키는 출발점이라는 역설적 선택이다. 동방정책 이후 인적 왕래와 이산가족 접촉, 우편·통신 및 교통 협력이 확대되고, 훗날에는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한 외교적 토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아무리 전략적으로 타당한 정책이라도 국민적 설득과 민주적 승인 없이 추진되면 심각한 국내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야당인 기민·기사연합은 동방정책을 공산주의에 대한 굴복이자 독일 통일을 포기한 매국 행위로 규정했다. 여당 의원 일부까지 이탈하면서 위기에 처한 브란트 정부는 1972년 건설적 불신임 투표에서 불과 두 표 차이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그해 조기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대중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외교적 결단은 지도자가 내릴 수 있지만, 그 결단을 지속 가능한 국가 전략으로 만드는 힘은 결국 국민의 승인에서 나온다는 교훈이다.
찬반 아닌 조건부 합의
지금 우리도 '주적이냐 위협이냐'를 놓고 진영의 싸움을 되살려선 안 된다. 필요한 것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엄중하게 관리하면서도 적대적 언어를 줄이고 외교적 선택지를 넓힐 수 있는 조건을 국민과 함께 찾는 일이다. 통일부가 제안한 외교적 유연성이 소모적인 진영 대립에 빠지는 걸 막고 남남 갈등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서로 다른 안보 인식 사이에서 합의의 조건을 탐색하는 시민 숙의의 장이 필요하다.
이 공론장은 단순한 찬반 투표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는 데 찬성하십니까?" 또는 "'주적'이라는 표현을 삭제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순간 대화는 타협하기 어려운 정체성 투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누가 더 평화를 사랑하는지, 누가 더 국가관이 투철한지를 겨루는 이념적 싸움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질문의 틀을 바꿔야 한다. 예컨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북한을 향한 적대적 표현을 완화하거나 호칭 변경을 검토할 경우, 우리 정부가 북한에 요구해야 할 최소한의 상호 조치는 무엇입니까?" 또는 "우리 정부가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되는 안보상의 레드라인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을 때 논쟁의 축은 정체성 대립에서 상호주의에 입각한 다양한 조건의 탐색으로 이동한다. 북한이 군사 핫라인을 복원하고, 접경 지역에서의 도발을 중단하며, 최소한의 신뢰 구축 조치에 응한다면, 등의 조건적 사고를 전개하면 적대적 표현의 완화나 호칭 변경을 유용한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시민들은 추상적인 친북과 반북의 구도를 벗어나 비용과 편익, 위험과 기회를 비교하며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조건부 합의' 방식이다. 모든 시민에게 북한에 관한 하나의 세계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안보관을 유지하면서도 어떤 조건에서 정책 변화에 동의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다. 협상론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 사회의 '합의 가능 영역(ZOPA, Zone of Possible Agreement)'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공론화의 목적은 갈등을 없애거나 만장일치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변화의 범위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확인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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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7일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축하방문하고 연설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8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대한민국이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우리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라면서 "우리를 때 없이 건드리지 말며 우리를 놓고 힘자랑내기를 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공식석상에서 과거 남조선이라 부르던 호칭을 '대한민국'으로 부르고 있다. 2024.10.8 |
|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공론화의 절차도 엄정해야 한다. 통일부는 공론화를 제안하고 필요한 정책자료를 제출하되, 의제 설계와 참여자 선정, 정보 검증과 토론 운영은 독립적인 공론화위원회에 맡겨야 한다. 이미 정책 방향을 제시한 부처가 전 과정을 주도하면 아무리 공정하게 운영해도 관제 공론화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모든 공론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참여 시민은 성별·연령·지역 등 인구사회학적 분포뿐 아니라 대북·안보 인식의 분포를 비례적으로 반영해 선발해야 한다. 동시에 소수 견해가 숙의 과정에서 묻히지 않도록 최소한의 대표성도 보장해야 한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인권 문제, 남북관계의 역사, 국제법과 헌법적 쟁점, 호칭 변경의 외교적 효과와 위험을 균형 있게 담은 자료도 제공해야 한다.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민간위원장 이창훈)의 '기후시민회의'가 시도하고 있듯, 정부와 여야, 안보 전문가와 평화 연구자, 탈북민과 접경지역 주민 등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시민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공론화 결과를 단순한 찬반 비율로 정리해서도 안 된다. 어떤 조건에서 호칭 변경을 수용할 수 있는지, 국민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상호조치는 무엇인지,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는 안보 원칙은 무엇인지 정밀하게 제시해야 한다. 정부 역시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수용하지 않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공식적으로 답해야 한다. 공론화 결과를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준수 또는 설명(Comply or Explain)' 원칙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공론화가 여론 수렴을 가장한 정책 홍보가 아니라 다양한 참여자가 국가 전략을 공동으로 형성하는 민주적 절차가 된다.
정부가 독점해 온 북한 의제 시민에게 돌려줄 때
북한은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인 동시에 평화를 위해 협상해야 할 상대다. 헌법적으로는 통일의 대상이면서 현실적으로는 독자적인 체제와 군사력을 가진 정치적 실체이기도 하다. 이 복합적인 존재를 '주적'이나 '조선'이라는 하나의 단어로만 규정하려 할 때 논쟁은 진영의 낙인찍기로 흐르기 쉽다.
따라서 정동영 장관의 실용외교와 이재명 대통령의 신중론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외교적 유연성에도 국민적 정당성이 필요하고, 정치적 신중함이 새로운 대북정책의 선택을 봉쇄하는 명분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오랫동안 정부와 정치권이 독점해 온 북한 의제를 시민에게 돌려줄 때, 대북정책은 진영의 낙인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함께 선택하고 책임지는 지속 가능한 국가 전략이 될 수 있다.
* 필자 소개: 은재호는 국무총리 소속 한국행정연구원에 재직하며 한국갈등학회장과 다수 정부 부처의 갈등관리심의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민통합위원회 위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EU융합전공 겸임교수 및 프랑스 파리 1대학 PRISM-Sorbonne 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며 연구 현장과 정책 현장을 이어주는 정책 중개자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주의 디자이너'를 '참칭'하는 그의 저서로는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국민통합 전략과 실행방안 연구>(2017), <혁신적 포용국가의 국가론적 지위와 이행전략>(공저, 2019), <공론화의 이론과 실제>(2022), <경세제민의 공공리더십>(공저, 2024), <여론 속의 여론>(공저, 202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