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영 / 넷플릭스 제공방송에서 무심코 꺼낸 '가문 자랑'이 광복절을 앞두고 거센 후폭풍을 낳고 있다.최근 넷플릭스 흥행작을 통해 대세 배우로 떠오른 하영(본명 안하영·33)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증조부의 이력을 두고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개인적인 가족사 언급에서 시작된 논란은 소속사의 성급한 부인과 하루 만의 입장 번복, 과거 기록의 재조명에 이어 방송·광고계의 잇단 '손절'로 번지고 있다.
■ '4대째 의사' 자랑서 시작된 증조부 친일 논란
배우 하영이 지난 7일 방송된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가문의 내력을 언급하는 모습. / '옥탑방의 문제아들' 방송 캡처논란의 출발점은 지난 7일 방송된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이었다.
넷플릭스 새 시리즈 '이런 엿같은 사랑' 홍보를 위해 정해인과 출연한 하영은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4대째 의사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하영은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듣기로 양의학을 일본에 가서 배워와 한양에 개원을 하신 첫 의사셨다"고 말했다. 증조부가 고종을 진료했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 또 할아버지와 아버지, 언니까지 의사로 이어졌다고 덧붙이며 남다른 가문의 내력을 밝혔다.
하영 개인의 이력도 화려했다.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미국 뉴욕 SVA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학창 시절 성적도 좋았다고 밝혔다.
방송 뒤에는 '4대째 의사 집안 출신 배우'라는 점이 화제가 됐다.
그러나 곧 네티즌들의 과거 역사 기록 추적이 시작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하영이 말한 증조부가 일제강점기 의사 안상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과거 행적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안상호는 1902년 일본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했고 귀국해 의사로 활동한 인물이다. 왕실 의료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그 뒤에 남은 기록들이었다.
■ "조선인과 상종 안 해"…증조부 행적 속속 재조명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 인터뷰 기사. '일선동화의 가정'(一鮮同化의 가정), 즉 '일본인처럼 생활하고 동화되는 것이 모범적이다'는 내용이다. / 국립중앙박물관방송 이후 안상호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보여주는 과거 자료들이 잇따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언론 보도였다. 1918년 12월 10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완전히(全然) 내지화(內地化)한 의사 안상호 씨의 가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비중 있게 다뤄졌다.
해당 인터뷰에서 안상호는 자신의 생활 양식을 설명하며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나는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는다. 일본 사람과 똑같다. 그러하니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
조선인들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다. 이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의 일본인 아내 이소코 역시 "11년 동안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 마디도 못 한다"고 밝혔다.
총독부 기관지는 안상호 가족을 일본식 생활에 동화된 사례로 소개했다.
다른 역사적 기록들도 이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및 고(故) 박영석 교수의 논문 등에 따르면, 안상호는 1909년 12월 서울 명동성당 인근에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의 단도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은 '을사오적' 이완용을 치료한 의료진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돼 있다.
나아가 1916년 결성된 관변 단체 '대정친목회'에 안상호가 평의원으로 참여한 사실도 확인됐다. 대정친목회는 이완용 등이 참여하고 경성 일대 유력 인사들이 총독부 시책 협력과 내선융화를 내세운 친일 성격의 단체로 평가된다.
'국사관논총' 논문에 실린 배우 하영의 증조부인 故안상호가 이완용을 치료했다는 내용. / 국사편찬위원회■ "사실무근" 하루 만에 번복…소속사 대응 도마
배우 하영 소속사 공식 입장문. /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논란이 커지자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의 성급한 초동 대응은 도리어 여론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소속사는 지난 10일 "하영의 증조부가 안상호인 것은 맞지만, 온라인에 제기된 친일 행적 의혹은 사실무근"이라며 관련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관련 기록이 잇따라 확인되자, 소속사는 불과 하루 만인 11일 공식 입장문을 내고 기존 입장을 번복했다.
소속사 측은 "추가 확인 결과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올라 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며 "충분한 검증 없이 '사실무근'이라 성급히 답변하여 혼란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충분한 사실 확인 없이 의혹을 부인했다가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꾸면서 논란은 오히려 더 커졌다.
하영의 부친도 11일 공개된 인터뷰에서 가족을 대표해 사과했다. 그는 가족이 안상호를 의친왕을 가까이서 진료하고 보필했던 인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 논란에 연루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러나 해명 과정에서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을 '경술국치'나 '한일강제병합'이 아닌, 식민주의적 용어로 지적되는 '한일합방'이라고 표현해 또 다른 논란이 일었다.
■ 유명 작가도 비판 가세…방송·광고계도 '손절'
/소재원 작가 인스타그램 캡처논란이 확산하자 작가 소재원도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영화 '터널', '소원' 등의 원작자인 소 작가는 개인 SNS를 통해 "광복절을 앞두고 씁쓸한 기사를 보았다"며 "살다 살다 친일파 조상 자랑질까지 보게 되다니"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아들아 독립운동 하지 마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친일 행적으로 부와 권력을 쌓은 이들과 달리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꼬집었다.
또 하영의 조부 안부호 교수의 소록도병원 근무 이력을 거론하며 "그리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조상을 두셨다면 소록도에 가보라"며 "그곳에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이 행한 비극의 역사를 마주해 보라"고 지적했다.
논란의 여파는 하영의 활동과 방송·광고계로도 번졌다.
광복절 하루 전인 오는 14일로 예정돼 있던 넷플릭스 '이런 엿같은 사랑' 라운드 인터뷰가 취소됐고, 공동 주연인 정해인의 인터뷰 일정 역시 취소되며 불똥이 튀었다.
넷플릭스 코리아가 공개할 예정이던 작품 홍보 콘텐츠 후속편도 현재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OTT 플랫폼 웨이브는 방송사의 요청에 따라 논란의 발화점이 된 '옥탑방의 문제아들' 다시보기 서비스를 중단했다.
삼성전자는 공식 유튜브 채널에 게재했던 하영 출연의 '삼성 아트 TV' 광고 영상들을 비공개 조치했고, 여성복 브랜드 아티드 역시 하영이 모델로 참여한 홍보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 강동원·이지아까지…'친일파 후손' 사례 재소환
배우 강동원, 배우 이지아 / AA그룹 제공 ·이지아 인스타그램 캡처이번 사태를 계기로 과거 조상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에 휩싸였던 연예인들의 대응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배우 강동원은 외증조부 이종만의 친일 이력이 알려진 뒤 대중 앞에 고개를 숙였다.
당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저는 외증조부의 미담을 들으며 자라왔다"며 "2007년 인터뷰를 한 시점에는 그분의 잘못된 행동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이후 영화 행사 등 공식 석상에서도 관련 논란에 대해 직접 사과했다.
배우 이지아 역시 조부 김순흥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알려진 뒤 "조부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깊이 인식하며,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며 역사의 진실을 겸허히 마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상의 과오를 가장 선명하게 인정했던 사례로는 음악인 전범선이 꼽힌다.
일제강점기 친일파 소설가 이인직(왼쪽)과 이인직의 5대손인 인디밴드 '양반들' 보컬 전범선(오른쪽) / 유튜브 채널 '뮤지엄피' 캡처밴드 '양반들'의 보컬 전범선은 방송에서 자신의 외가 5대조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소설가 이인직임을 밝히며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을 때 옆에서 일본어 통역을 했던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였다"고 말했다. 또 이인직을 두고 "너무 명명백백하게 친일을 하신 분"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처럼 앞선 이들이 조상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사과하면서, 하영 측의 대응 방식과 비교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 "연좌제는 경계"…대중이 분노한 진짜 이유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페이스북 캡처논쟁이 확산하자 무분별한 단정과 연좌제식 비난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은 개인 SNS를 통해 "단지 특정 단체에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신중론을 펼쳤다.
고종 독살설 역시 당시 퍼진 풍문일 뿐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다며, 주치의였다는 이유만으로 안상호를 친일파로 단정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고 짚었다.
그럼에도 이번 논란은 단순히 조상의 친일 여부나 '후손'이라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족사를 자부심의 근거로 꺼낸 방식과 소속사의 성급한 대응, 이후 하영의 침묵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대중이 진짜 분노하는 지점은 하영 씨가 친일파 후손이라는 신분 자체보다, 식민지 치하에서 조상이 누린 특권 이력을 아무런 역사적 의식 없이 개인의 '화려한 스펙'으로 포장해 자랑했다는 안일함에 있다"며 "가문의 훈장처럼 내세운 이력이 실상 민족의 아픔과 맞물려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 화를 부른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광복절을 앞두고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공인이 최소한의 사실 검증도 없이 집안 마케팅을 펼치고, 논란 이후 해명 번복과 회피성 침묵으로 일관한 태도가 여론의 역풍을 키웠다"며 "지금 대중이 원하는 것은 화려한 가문의 후광이 아닌, 역사 앞에서의 겸허한 성찰과 진정성 있는 책임감"이라고 강조했다.
조상의 삶을 후손이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적인 자리에서 꺼낸 가족사에 예상하지 못했던 과거가 드러났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명할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당사자의 몫이다.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자랑에서 시작된 논란은 이제 하영이 자신의 가족사를 어떤 시선으로 마주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