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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아 80주년 기념 행사에서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발표하는 모습 |
| ⓒ 기아 |
자동차 회사가 인공지능(AI)을 쓴다고 하면 흔히 자율주행차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현대자동차그룹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조금 다르다. 자동차에 AI를 넣기에 앞서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 자체를 AI 회사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연구원이 충돌시험 자료를 찾고, 생산직원이 차량을 확인하고, 정비사가 고장 원인을 찾고, 고객센터 직원이 모바일 앱의 고객 리뷰에 답하는 일까지 AI가 파고들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12일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내놓은 '그룹 AX 성과 발표회'가 그렇다. 지난 2019년부터 진행한 디지털 전환(DX·Digital Transformation)과 최근의 인공지능 전환(AX·AI Transformation) 성과는 현대차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현대차가 갑자기 생성형 AI 열풍에 올라탄 것은 아니라는 것.
우선 시간을 2018년으로 돌려보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당시 "IT 기업보다 더 IT 기업 같은 회사가 되겠다"고 했다. 이후 회사는 업무와 데이터를 디지털로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AI가 일을 하려면 그 전에 AI가 읽고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차쪽 설명대로라면 지난 수년간 진행한 DX가 이제 AX를 위한 일종의 '도로 공사'였던 셈이다.
현대차·기아 일반·연구직 80%가 사내 생성형 AI 사용
본격적인 변화는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현대차는 사내 생성형 AI 플랫폼인 'H Chat Pro'를 운영하고 있다. 보안이 확보된 사내 환경에서 직원들이 챗 GPT와 제미나이, 클로드 등을 골라 사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2025년부터 일부 개발자뿐 아니라 일반 직원에게도 개방했다.
지난 7월 기준 이용자는 이미 3만명을 넘어섰다. 현대차·기아 일반·연구직 직원의 약 80%에 해당한다. 이제 문서 작성이나 정보 검색뿐 아니라 데이터 분석과 프로그램 개발까지 생성형 AI가 일상적인 업무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게 현대차의 설명이다. 개발자가 아닌 직원이 자신에게 필요한 AI 에이전트를 직접 만드는 사례도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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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 현대차 서울 양재 본사에서 열린 ‘현대차그룹 AX 성과 발표회(Beyond AI, Transforming the Way We Work)’에서 현대차·기아 ICT담당 진은숙 사장이 발표하는 모습 |
| ⓒ 현대차그룹 |
남양연구소가 도입한 '충돌안전 AI 어시스턴트'가 대표적이다. 과거 차량 충돌시험 결과와 사진, 해석 자료 등이 여러 시스템에 흩어져 있었는데 AI가 이를 한꺼번에 검색해 비슷한 사고 사례와 차량 구조, 상해 원인 등을 분석하도록 했다. 회사 쪽에 따르면 연구원들이 관련 사례를 찾고 분석 자료를 검토하는 시간은 약 90% 줄었다. 경험 많은 엔지니어의 머릿속에 있던 노하우가 데이터와 AI를 통해 조직 전체의 자산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도 있다.
공장에서는 AI가 자동차의 '신분증'을 확인한다. 생산 라인의 카메라가 차량식별번호(VIN)를 읽고 실제 차량과 시스템에 등록된 차량이 맞는지 AI가 실시간으로 대조한다. 현대차는 이 시스템을 국내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인도, 아시아태평양 등 약 70개 생산거점에 적용했다. 연간 52억4000만 원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는 것이 회사쪽 설명이다. 부품을 실어 나르는 대차의 이동 경로도 AI가 찾아내면서 생산 중단 시간은 약 86% 감소했다고 밝혔다.
정비와 고객 서비스 대응도 달라졌다. 해외 정비사는 차량 오류 코드나 증상을 자연어로 입력하면 AI가 정비 매뉴얼과 과거 기록을 분석해 진단 결과를 내놓는다. 회사 쪽 집계로 정비 대응시간은 약 42% 단축됐다.
고객이 앱에 남긴 리뷰도 AI가 읽는다. 내용과 불만 유형을 분류하고 답변 초안까지 작성한다. 사람이 리뷰 하나를 처리하는 데 평균 35분 걸리던 것이 5분 수준으로 줄었고, 현재 전체 리뷰의 85% 이상을 AI가 처리하고 있다. 현대차는 다음달 부터 전체 고객 리뷰 대응 과정을 자동화할 계획이다. 물론 이날 공개한 업무시간과 비용 절감 효과는 현대차 자체 집계다. 실제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 효과는 향후 장기간의 검증이 필요하다.
정의선의 AX 실험 "세계에서 AI를 가장 제대로 활용하는 기업이 되는 것"
그럼에도 이번 발표에서 주목할 부분은 AI의 성능 자체보다 AI를 조직에 어떻게 집어넣고 있는가다. 생성형AI를 일부 개발자나 연구원의 전문 도구로 두는 것이 아니라 일반 직원이 직접 쓰고, 자신에게 필요한 프로그램까지 만들게 하는 방식이다. 이날 기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바이브 코딩' 교육도 같은 맥락이다. 코딩을 몰라도 자연어로 원하는 기능을 설명하면 AI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식이다. 정의선 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도 앞서 같은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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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수) ‘현대차그룹 AX 성과 발표회’에서 (왼쪽부터) 현대차 제네시스고객경험팀 장영석 책임매니저, 현대차·기아 ICT담당 진은숙 사장, 정보보안2실 이상홍 상무, 웹프론트엔드개발팀 서창윤 책임매니저가 발표하는 모습 |
| ⓒ 현대차그룹 |
현대차의 다음 목표는 '피지컬 AI(Physical AI)'다. 지금까지 AI가 사무실과 공장의 업무를 바꿨다면 앞으로는 자동차와 로봇, 스마트 팩토리처럼 현실 세계에서 움직이는 기계와 AI를 결합하겠다는 것이다. 보스턴다이내믹스를 보유하고 있고 자동차 생산공장이라는 거대한 제조 현장을 운영하는 현대차 입장에서는 AX가 단순한 업무 효율화 사업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진은숙 현대차·기아 ICT담당 사장은 이날 "현대차그룹의 목표는 AI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업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AI를 가장 제대로 활용하는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AX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와 운영 경험, 실행 역량은 다가올 Physical AI 시대를 준비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동차 산업의 경쟁 공식도 달라지고 있다. 좋은 엔진과 변속기, 배터리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가 더 많은 데이터를 갖고 있는지, 그 데이터를 누가 더 빨리 AI와 연결해 실제 생산성과 제품 경쟁력으로 바꾸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다. 2018년 정의선 회장의 "IT 기업보다 더 IT 기업 같은 회사"라는 선언이 있었다면, 8년 뒤 현대차그룹은 이제 그 문장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이고 있다.
'자동차를 잘 만드는 회사'를 넘어 'AI를 가장 잘 쓰는 제조업 회사'가 될 수 있을까. 현대차그룹의 AX 실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