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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피 흘릴 때 미국은 세계경제 패권 샀다

[‘돈’으로 본 세계사] 38년 예산 전비로 쓴 영국, 英·佛 국채 매입한 美

● 17세기 초 ‘30년전쟁’,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
● 독일 통일은 부르주아가 귀족과 지주 누른 ‘시민혁명’
● 영국·프랑스 채권 투자한 美, 연합군 승리로 떼돈 벌어
● 인류 삶 바꾼 군수품…트렌치코트·스팸·인스턴트커피
● 공산국가 태동은 국제질서 판 바꾼 역사의 변곡점


1919년 6월 28일, 유럽 각국에서 온 외교단과 대표단이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전당에서 베르사유 평화조약 체결을 지켜보고 있다. 작은 사진은 베르사유조약에 참여한 각 국 대표들의 서명. Gettyimage 1919년 6월 28일, 유럽 각국에서 온 외교단과 대표단이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전당에서 베르사유 평화조약 체결을 지켜보고 있다. 작은 사진은 베르사유조약에 참여한 각 국 대표들의 서명. Gettyimage
독일은 동프랑크에서 태동했다. 10세기 중엽 동프랑크 왕 오토 1세가 유럽에 쳐들어온 아시아계 마자르인을 격퇴하고 이탈리아까지 진출한다. 이에 교황 요한 12세는 그를 서로마 황제로 칭했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시작이다. 하지만 볼테르가 지적한 대로 신성로마제국은 로마와는 상관이 없었고, 제국도 아니었으며, 실제로 오늘날의 독일 및 오스트리아 지역만 지배한 공국들과 자유도시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먼저 제후들에 의해 선출된 후 교황이 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주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5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세습하면서 독일 지역도 장악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은 17세기 초 30년전쟁(1618~1648)에서 프랑스, 스웨덴 등에 패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는다. 30년전쟁은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 신교가 널리 퍼지면서 벌어진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전쟁이었다. 전쟁이 유럽 사회에 미친 여파는 상당했다. 전쟁 이후 유럽은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근대적 국가체제로 전환됐다. 경제 강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도 이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로 후퇴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독일 통일은 부르주아가 귀족과 지주 누른 ‘시민혁명’독일 지역에는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공국 등이 있었지만 30년전쟁 이후 독일 동북부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로이센이 점점 강성해졌다. 융커(Junker)라 불리는 대지주들이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프랑스·러시아 등과 농산물 수출 경쟁을 했고, 융커 중에는 상공업에 뛰어들어 부르주아가 되는 이들이 많았다. 프로이센은 지속적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면서 다른 독일 지역을 압도해 나갔다. 프랑스에서 낭트칙령이 폐지되면서 위그노들이 프로이센으로 대거 이주했고, 베를린을 중심으로 상공업 도시들이 더욱 발전했다.

프로이센은 1701년에 왕국이 됐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 재임 1740~1786) 시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때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차지하기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제국과 전쟁을 벌인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과 7년전쟁(1756~1763)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제국(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설 정도로 강해졌음을 말해 주는 사건이다. 18세기 말부터 프로이센에서는 광업과 공업이 번창했고, 영국의 증기기관, 제철법 등 신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산업혁명이 시작된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나면서 프로이센의 산업혁명이 본격화했고, 점차 그 여파가 프로이센 주변의 작센, 하노버 공국 등에도 파급됐다. 그에 따라 1834년 독일 내 공국 간에 관세동맹이 체결되고 시장을 분리하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적어도 경제적 통일이 이뤄졌다. 이제 독일인들 사이에 경제적 통일을 넘어 정치적 통일을 이루려는 열망이 생겼다. 1848년 독일 각 공국의 지식인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독일 통일의 방식을 논의했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소(小)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리더로 하는 대(大)독일주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소독일주의는 부르주아들이 중심이 되어 공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독일주의는 귀족과 지주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하는 소독일주의로 의견이 모였다.

통일을 이루려면 오스트리아와 이를 지지하는 보수세력과의 싸움이 불가피했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철혈(鐵血) 재상 비스마르크였다. 그는 프로이센에 대항한 독일 내부의 귀족과 제후들을 직접 무력으로 제압하지 않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국가를 굴복시킴으로써 그들을 복종시키려 했다. 독일인끼리의 내전을 피함으로써 통일 이후에도 내부 결속을 다지려 한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에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과는 대조적인 전략이었다.

1868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다. 그럼에도 바이에른 등의 남부 독일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와 결탁해 프로이센에 대항했고, 이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이 보불전쟁(普佛戰爭)이라고 불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이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의 배경인 알자스-로렌 지방이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갔다. 프로이센은 1871년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일 통일을 완수했다. 독일의 통일은 후발 강국의 탄생이면서 동시에 부르주아 계층이 귀족과 지주 계층을 누른 일종의 시민혁명이었다.

비스마르크 퇴진 후 유럽에 감돌기 시작한 전운통일 이후 대내외적인 안정 속에서 독일은 급성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1888년 비스마르크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죽고, 그 손자인 빌헬름 2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빌헬름 2세는 평화 질서 속에 내실을 다져가던 비스마르크를 끌어내리고,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연결하는 3B 정책 등 적극적인 대외 팽창정책을 펴면서 주변국을 긴장시켰다.

서아시아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과 남으로 확장하려는 러시아가 독일의 이런 대외정책을 반길 리 없었다. 영국은 카이로, 케이프타운, 캘커타(콜카타)를 잇는 3C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범(汎)게르만주의 기치를 내걸고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대립하는 상황은 크림전쟁을 겪은 오스만제국도 마찬가지였다. 1891년 러시아는 독일과 우호 관계를 끊고 보불전쟁으로 독일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다. 이로써 19세기 말 유럽은 자연스럽게 독일-오스트리아 진영과 프랑스-러시아 진영으로 나뉘었다.

독일 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 Gettyimage 독일 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 Gettyimage
영국은 그때까지만 해도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은 당시 극동아시아에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손을 잡았다. 1894년 청나라, 1905년 러시아를 꺾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급기야 1910년 조선을 합병한 후 서서히 중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이 독일 진영에 합류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야욕을 깨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경쟁하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독일과 손을 잡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처음에는 영국도 그럴 계획이었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 러시아와 프랑스보다 급성장하는 독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영국은 러시아-프랑스 진영에 가담해 이들과 삼국협상을 맺게 된다. 이렇게 20세기 초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과 이에 맞서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이 형성되면서 유럽에는 서서히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영국·프랑스 채권 투자한 美, 연합군 승리로 떼돈 벌어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서 1914년 6월 사라예보에 총성이 울렸다. 순방 중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살해된 것이다. 발칸반도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슬라브 민족주의 세력의 도발이었다. 그것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서막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강대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국제질서의 균형이 깨지고,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야욕이 충돌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마이클 베클리 교수가 그의 저서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Danger Zone)’에서 주장했듯 도전국이 패권국을 따라잡으려는 조급증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제1차 세계대전은 바로 이런 조급증에서 도전국 독일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사라예보의 총성은 단지 전쟁의 트리거였을 뿐이고, 실제 전쟁의 원인은 식민지에 대한 유럽 열강들의 야욕에 있었다. 패권을 차지하려는 독일의 조급함과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의 경계심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뒤에 있는 러시아가 두려워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자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한 달 만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기관총 등 신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참호전의 양상을 띠었다. 참호 속에서 대치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전선이 고착됐다. 독일과 프랑스가 맞선 서부전선의 마른 평원(the Marne)에서 벌어진 참호전은 4년 이상 계속됐다. 긴 전쟁 기간, 새로운 살상무기의 발명과 치열한 전투, 그리고 참호의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전투기가 등장하면서 전선(戰線)뿐만 아니라 모든 곳이 폭격의 대상이 되어 전후방을 가리지 않는 총력전이 전개됐다. 여성들은 군수품 생산에 동원됐고, 식민지는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가혹한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치머만의 멕시코 전보 사건으로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하자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같은 해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가 연합군에서 빠졌지만 전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1918년 킬 군항에서 독일 해군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여기에 독일 민중이 합세하면서 빌헬름 2세는 해외로 망명했다. 이어 정권을 잡은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은 그해 11월 연합국에 항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참전국들은 천문학적인 전비를 부담해야 했다. 전쟁 기간에 전 세계 GDP의 24%에 해당하는 금액이 소모됐으며, 특히 영국은 38년치 국가 예산을 전비로 썼다. 각국은 증세, 해외 차입, 국채 발행 등의 방식을 사용해 전비를 조달했다.

영국은 전쟁 초기에 국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는데, 국채 인수를 위해 영란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했다. 이로 인해 통화량이 늘어났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J P 모건이 영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인수해 판매했다. 미국인들은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이길 것이라 점치고, 두 나라의 국채를 대규모로 매입했다. 미국에서 들어온 전쟁 자금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한 독일 군대에 맞섰다. 미국의 투자가 커지면서 이제 미국도 영국과 프랑스가 이기기를 희망했다. 연합군이 지면 미국인들이 보유한 영국·프랑스 채권이 휴지 조각이 되기 때문이다.

1917년 미국이 연합군에 합류했고, 미국 정부는 월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다. 미국이 ‘T-bond’라 불리는 국채를 발행한 것도 이때다. 결국 미국의 바람대로 연합군이 승리했고, 미국은 이 전쟁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파리강화회의와 전후 독일의 배상금 1320억 ‘금마르크’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는 과거의 어느 전쟁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승전국, 패전국 할 것 없이 전쟁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사망자는 약 2000만 명(군인 1000만 명)에 달했고, 부상자까지 포함한 사상자는 3000만 명이 훌쩍 넘었다.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돼 독일 등 패전국에 대한 처분이 결정됐다.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을 통해 알자스-로렌 지방을 다시 프랑스에 양도했고,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분리됐고,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등에 영토를 할양했다.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강해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고, ‘국제연맹’의 설립을 제안했다. 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20년 미국의 제안대로 국제연맹이 발족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하지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 역시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지 않았다.

패전국인 독일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1921년 6월 런던회의에서 독일의 배상금이 1320억 ‘금마르크’로 결정됐다. 여기서 ‘금마르크’란 순금 가치와 연동되는 전쟁 전의 마르크화를 말한다. 존 메이어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영국 대표단을 사임하면서,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이 후일 세계경제에 큰 부담이 될 거라 경고했다. 독일은 어쩔 수 없이 배상금에 동의했지만 사실상 갚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화증발(通貨增發), 즉 통화 발행량의 증가였다. 하지만 점차 금융가와 기업가들은 정부가 금도 없이 화폐를 남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마르크화를 파운드나 달러로 환전해서 해외로 빼돌렸다. 마르크화의 가치는 계속해서 하락했고, 한 달에 물가가 50% 이상 오르는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상황이 계속됐다. 결국 1923년에는 물가가 전쟁 전에 비해 1조 배 이상 올랐고,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렌텐마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923년 11월 23일 발행된 임시 화폐다. Gettyimage ‘렌텐마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923년 11월 23일 발행된 임시 화폐다. Gettyimage
독일의 무너진 경제는 1923년 통화 전담 장관이 된 샤흐트에 의해 수습됐다. 그는 기존 지폐를 폐지하고 금이 아닌 토지와 부동산에 의해 가치가 보장되는 ‘렌텐마르크’라는 화폐를 발행했다. 샤흐트는 화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렌텐마르크의 발행 한도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시중의 통화량을 통제했고, 결국 천정부지로 치솟던 물가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렌텐마르크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1924년 이후 미국은 독일의 경제 재건을 위해 달러 자본을 대규모로 독일에 투입했다. 유럽 채권을 대량 보유한 미국은 유럽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은행가이자 후일 부통령이 되는 찰스 도스를 회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독일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다. 독일은 이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배상금을 갚았고, 영국과 프랑스는 그 돈으로 미국에 진 채무를 상환했다. 결국 돈은 돌고 돌아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 경제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미국 달러는 유럽 경제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독일 경제의 회복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1929년 터진 세계대공황은 상승기류를 타던 독일 경제를 다시 멈추게 했다. 미국 자본으로 경제를 재건하고 있던 독일은 미국이 달러 자본을 회수하자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다. 독일 경제는 다시 불황에 빠졌다. 이런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이가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세계를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다. 케인스의 경고가 적중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우선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전에 보지 못했던 가공할 신무기들이 등장했다. 기관총, 비행기, 탱크, 잠수함 등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전의 무기들이 이때 등장했다. 탱크(tank)는 개발 초기에 기밀 유지를 위해 물 운반용 탱크라고 불렸던 까닭에 ‘탱크’가 전차의 고유명사가 됐다.

인류 삶 바꾼 군수품…트렌치코트·스팸·인스턴트커피
트렌치코트와 통조림 캔, 인스턴트커피 등 전쟁 때 발명된 군수품은 인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Gettyimage 트렌치코트와 통조림 캔, 인스턴트커피 등 전쟁 때 발명된 군수품은 인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Gettyimage
과거 전쟁에서 보병들이 줄을 맞춰 진격하면서 총을 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전쟁 초 그렇게 했다가 기관총의 난사로 병사들이 모두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 후 참호를 파고 대치하는 참호전이 일반화됐다. 금융의 발달은 엄청난 자금의 전쟁 투입을 가능케 했다. 이 돈은 무기와 포탄을 대량으로 만들어냈고, 결국 전쟁을 더욱 격렬하고 참혹하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이동했다. 영국이 몰락하고 미국이 세계사 전면에 부상했다. 전쟁 과정에서 미국은 공장을 최대치로 가동해 군수물자를 유럽에 수출했고,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부상했다. 전쟁 직전 미국의 해외투자 금액은 35억 달러였던 반면 유럽이 미국에 투자한 금액은 72억 달러였다. 이렇게 채무국이던 미국은 전쟁 후 126억 달러의 채권국으로 바뀌었다. 유럽 금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이동했다. 땅과 자원 부국을 넘어 돈으로도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된 것이다.

전쟁 때 발명된 군수품들은 인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상품들이 이 전쟁에서 나왔다. 트렌치코트(trench-coat)가 유행했다. 보통 ‘바바리’라고 불리는 트렌치코트의 ‘트렌치’는 참호라는 뜻이다. 궂은 날씨와 참호의 습한 환경으로 인해 탄생한 군복이 전후 ‘애수’와 같은 전쟁영화에 등장하면서 일상 패션이 된 것이다. 참호에서 쥐나 세균으로부터 식량을 보호하기 위해 통조림 캔이 발명됐다. 통조림 캔이 점점 업그레이드돼 후일 제2차 세계대전의 인기 전투식량 스팸(SPAM)이 탄생했다. 스팸은 스파이스 햄(spiced ham)을 줄인 단어로 ‘양념이 된 햄’이란 뜻이다.

인스턴트커피도 이때 군인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후일 네스카페, 맥스웰 등 군용 커피 납품회사는 세계적인 커피 회사로 성장했다. 남성 손목시계도 제1차 세계대전의 산물이다. 원래 손목시계는 여성용 팔찌 정도로 여겨지면서 남성들에게 외면당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회중시계는 불편하고 위험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손목시계를 차기 시작했고, 전후에는 남성들에게 일반화됐다. 당시 영국의 공식 군용 시계였던 ‘오메가’는 후일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가 됐다.

무엇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동했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붕괴를 알리는 전쟁이었고, 러시아혁명과 독일 공화국 수립으로 차르와 카이저가 지배하던 군주제가 종말을 고했다. 민족국가와 공산국가 태동은 국제질서의 판을 바꾸는 역사의 변곡점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는 현대의 시작점을 거칠게 지나고 있었다.

강승준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前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現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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