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판 중앙정보국(CIA)’으로 불리는 국가정보국과 그 사령탑인 국가정보회의가 7월 31일 공식 출범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국가정보회의 의장을 맡는다. 뉴시스 |
이들의 우두머리는 2024년 2월 아에로플로트 도쿄 지점장으로 부임해온 GRU 장교 막심 블라디미로비치 필첸코프(가명·49)였다. 당시 필첸코프는 외교관이나 사업가 등으로 위장한 수십 명에 달하는 정보요원들을 지휘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에 일본산 첨단 부품과 장비를 베트남 등 제3국을 거쳐 밀반입하는 작전을 벌여왔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따르면 러시아군의 미사일과 드론들 중 90%가 일본산 부품을 사용해왔다.
일본판 CIA 공식 출범이들의 활동이 들통 난 것은 러시아군이 5월 Kh-101 순항 미사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고층 아파트를 타격해 최소 24명이 사망한 공습 때문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군 조사관들은 미사일 잔해에서 러시아 수출이 금지된 일본산 부품들이 대거 포함된 것을 확인했다. 이후 서방 정보기관들은 러시아가 일본에서 첨단 부품을 확보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서방 각국은 2022년 2월 24일(이하 현지 시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정보요원 수백 명을 추방했지만, 이들 가운데 수십 명은 신분을 위장해 일본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이 러시아로 몰래 반입시킨 일본산 부품들은 우크라이나 공격을 위한 러시아군의 드론, 미사일 등 첨단무기 생산에 투입됐다.
서방 정보기관들은 일본 정부에 러시아 정보요원들의 활동을 알리는 등 수차례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일본 정부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일본에는 외국 스파이를 포괄적으로 처벌할 법이 제대로 없을 뿐 아니라 각 부처 정보기관들을 조율하고 통제할 중앙 조직이 없었다. 일본은 해외 정보기관조차 없다. 필첸코프는 미국 뉴욕타임스(NYT)의 특종 보도(7월 13일자)로 신분이 노출되자 일본을 몰래 빠져나갔다.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 언론들이 NYT 기사를 인용해 러시아 스파이 활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일본 국민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일본판 중앙정보국(CIA)’으로 불리는 국가정보국과 그 사령탑인 국가정보회의가 7월 31일 공식 출범함으로써 앞으로 일본이 ‘외국 스파이들의 천국’ 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의장을 맡은 일본의 국가정보회의에선 이날 국가공안위원장, 관방장관, 법무상, 외무상 등 9개 부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정보수집·분석 활동의 지침이 될 국가정보전략 수립과 외국 세력에 의한 공작 활동에 대처하기 위한 이른바 ‘스파이 방지 법안’ 추진 방안이 논의됐다.
국가정보회의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에서 ‘국가정보회의 설치법안’이 5월 통과된 것에 따른 것이다. 이 법은 국가정보회의를 국가의 정보 수집 활동에 사령탑 기능을 부여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또 국가정보회의를 지원하는 사무국으로 미국의 CIA와 유사한 정보기관인 국가정보국을 신설한다는 조항도 들어있다. 요원 730~750명 규모로 구성된 국가정보국의 초대국장으론 경찰청 출신인 하라 카즈야 전 내각 정보관이 임명됐다. 국가정보국은 내각정보조사실, 경찰청, 외무성, 공안조사청 등 각 기관이 수집한 정보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국가 정보수집의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에선 그동안 한국의 국가정보원, 미국의 CIA에 해당하는 정보기관이 없었다. 일본 각 부처에서 정보활동에 종사하는 인원은 모두 3만3000여 명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을 능가하는 규모이지만 정부의 정보 기능은 내각 정보조사실, 경찰청, 외무성, 방위성, 공안조사청 등으로 분산돼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의 정보력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약하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하라 가즈야 초대 일본 국가정보국장(왼쪽)과 기하라 미노루 일본 관방장관이 7월 31일 국가정보국 현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일본 총리실 제공 |
실제로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가 1952년 일본판 CIA 창설을 추진했지만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현재의 내각 정보조사실을 만드는 데 그쳤다. 아베 신조 전 총리도 통합정보기관 신설을 추진했지만 무산됐었다. 하지만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해 10월 정보 수집 능력 확대를 위해 국가정보국을 신설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내걸었다. 그 이유는 경제안보담당상을 지낸 다카이치 총리가 정보 수집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해왔기 때문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2월 20일 중의원에서 시정 연설을 통해 “일본은 전후 가장 엄혹하고 복잡한 안보 환경에 놓여 있다”며 “질 높은 정보를 적시에 모아 국가 의사결정에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국가정보국 신설은 강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다카이치 총리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방위비 증액, 반격 능력 강화, 살상 무기 수출 규제 완화에 이어 정보기관 신설까지 일본의 안보 정책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일본 국민들이 국가정보국 신설을 지지하는 이유가 중국의 군사력 강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또 중국이 자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에 상당한 반감을 보여 왔다. 실제로 중국도 일본어 뉴스 매체로 위장한 온라인 사이트를 이용해 친중 성향의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를 확산시켜 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온라인 데이터 분석을 통해 지난해 중의원 선거 직전 다카이치 총리를 비판하는 온라인 글들이 확산했고, 일련의 해시태그를 붙여 글을 올린 복수의 계정을 비교한 결과 정보 공작을 벌인 중국계 계정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기관은 첩보 활동에 전문 요원뿐만 아니라 유학생, 연구원, 사업가 등과 심지어 호스티스까지 활용해 자위대의 군사 시설은 물론 산업 기술 등 매우 폭넓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사나에 총리(왼쪽)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0월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
집권 여당인 자민당도 이에 맞춰 외국 세력의 부당한 개입을 막고 감청 권한을 확대하는 정보 수집·분석(인텔리전스 활동)과 관련된 법안을 제정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또 2027년 말까지 해외에서 정보 수집 활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대외정보청(가칭)’ 창설도 추진할 방침이다. 일본의 대외 정보청 창설 의도는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서방의 정보 동맹체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도 참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이 파이브 아이즈에 참여하려면 해외 정보 수집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중국은 일본의 국가정보국 신설 등 정보력 강화에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마오닝 외교부 대변인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의 정보기관은 군국주의의 전면적 추진과 대외 침략 전쟁 발동의 길을 열어 아시아 인근 국가들과 일본 국민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저질러 왔다”고 비판했다. 뤼차오 랴오닝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원은 “정보활동은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라 군사 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서 “과거 중국 침략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일본 정보기관의 부활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일본의 정보력 강화가 앞으로 자국의 대만 침공 등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 국가정보국 신설을 계기로 중국·러시아 등과 치열한 정보전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일본판 중앙정보국(CIA)’으로 불리는 국가정보국과 그 사령탑인 국가정보회의가 7월 31일 공식 출범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국가정보회의 의장을 맡는다. 뉴시스
하라 가즈야 초대 일본 국가정보국장(왼쪽)과 기하라 미노루 일본 관방장관이 7월 31일 국가정보국 현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일본 총리실 제공
사나에 총리(왼쪽)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0월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