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만화 원작, 일본에선 두 편의 영화로 개봉
● 음식과 일상을 통해 삶을 성찰하는 일본판
● 한국선 경쟁사회에 지친 청년의 회복 담아내 리메이크
● 조용히 침몰하던 삶 떠나 고향에서 숨 고르는 주인공
● 천천히 변하는 자연처럼, 소모된 삶은 시나브로 회복해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포스터. 플레스엠 엔터테인먼트 페이스북 캡처 |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성장을 위한 기다림을 담은 영화다. 사계절을 배경으로 논과 밭, 장독대와 텃밭, 그리고 갓 수확한 재료로 차려낸 음식이 등장한다. 얼핏 보면 자연과 음식을 담은 힐링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가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그 풍경 너머에 한 사람의 삶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지친 한 청춘이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만의 계절과 리듬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김태리·왼쪽)이 초등학교 동창인 은숙(진기주), 재하(류준열)와 대화하는 장면. 네이버 영화 |
만화의 인기에 힘입어 2014년과 2015년에는 모리 준이치 감독에 의해 두 편의 영화(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 편)로 제작됐다.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는 일반적인 성장영화나 드라마와는 결이 다르다. 큰 갈등도, 극적 사건도 거의 없다. 주인공 이치코(하시모토 아이)는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밭을 일구고 음식을 만들며 살아간다. 영화는 감자를 심고, 토마토를 수확하고, 갓 거둔 재료로 한 끼를 차리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영화를 보고 나면 줄거리보다 풍경이 오래 남는다. 여름 햇살 아래 익어가는 토마토, 가을 들판의 색채, 겨울 눈밭의 고요함, 봄의 새싹이 영화 전체를 감싼다. 그 풍경 속에서 계절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된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일부로 살아가며, 음식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보여주는 가장 일상적인 언어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는 영화 ‘카모메 식당’(오기가미 나오코 연출, 2006년 개봉)이나 ‘앙: 단팥 인생 이야기’(가와세 나오미 연출, 2015년 개봉)처럼 음식과 일상을 통해 삶을 성찰하는 일본 영화의 감수성과도 맞닿아 있다.
만화 ‘리틀 포레스트’ 단행본 표지. 이가라시 다이스케 X 캡처 |
201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는 청년의 불안이 뚜렷하게 드러나던 시기였다. 취업난과 주거 문제,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한 미래는 많은 청년을 지치게 만들었다. ‘N포세대’와 ‘헬조선’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무너졌고, 청년은 성공보다 생존을 먼저 고민해야 했다.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매개, 음식임 감독은 바로 이 시대적 공기를 영화 안으로 가져왔다. 일본판의 주인공 이치코가 자연 속 삶을 선택한 인물에 가깝다면, 한국판의 주인공 혜원(김태리)은 경쟁사회에 지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는 임용고시 준비에 실패했고, 서울에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다. 영화가 시작될 때 혜원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 작은 차이가 영화의 결을 크게 바꾼다.
임 감독은 꾸준히 사람의 얼굴을 바라봐 온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는 거창한 영웅보다 현실 속에서 고민하고 흔들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자주 등장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에서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승패보다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보여주었고, ‘제보자’(2014)에서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진실을 지키려는 개인의 선택을 그려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리틀 포레스트’는 임 감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겨울, 봄’ 편(왼쪽)과 ‘리틀 포레스트 가을, 여름’ 편의 포스터. 영화사 진진 X 캡처 |
한국판과 일본판은 주인공을 비추는 시선에서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일본판의 이치코가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인물이라면, 한국판의 혜원은 삶의 방향을 잃은 뒤 다시 자신을 회복해 가는 인물이다. 관객은 혜원이 밭을 일구는 모습보다 먼저 지친 얼굴을 보고, 음식을 만드는 손길보다 먼저 흔들리는 마음을 만난다. 이 차이 때문에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는 단순한 리메이크에 머물지 않는다. 같은 원작에서 출발했지만,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청춘의 질문을 새롭게 품은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리틀 포레스트’를 이야기할 때 음식을 빼놓을 수는 없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줄거리보다 영화 속 음식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재료를 수확하고,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이다. 음식은 단순히 관객의 식욕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임 감독은 음식이 만들어지는 시간을 통해 혜원의 내면을 보여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식사하는 장면. 뉴시스 |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의 맛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을 묘사했다. 맛과 냄새는 때로 사진이나 말보다 더 강하게 과거를 불러온다. ‘리틀 포레스트’의 음식도 감각의 기억을 품고 있다. 혜원은 음식을 만들며 어머니를 다시 떠올리고, 그 기억을 되새기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조금씩 알아간다. 음식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현재로 불러오는 장치가 된다.
청춘의 얼굴을 한 혜원혜원은 거대한 비극을 겪은 인물이 아니다. 시험에 떨어지고, 연애가 시들해지고, 아르바이트로 하루를 버티며, 내일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함이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것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절망이 아니다. 매일 조금씩 침잠하는 모습에 가깝다.
영화는 혜원을 실패한 청춘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이 성과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를 조망한다. 영화 속 혜원의 귀향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더는 자신을 소모하지 않기 위한 숨 고르기로 읽힌다. 관객들은 혜원이 고향집 부엌에서 밥을 짓고, 밭에서 재료를 거두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오래 잊고 있던 자기 자신과 다시 마주하는 시간을 함께 경험한다.
혜원 곁에는 초등학교 동창인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이 있고,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도시를 떠났고, 누군가는 고향에 남았으며,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어느 한 선택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고, 저마다의 속도로 삶을 버텨내며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영화는 혜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초상을 그린다.
‘리틀 포레스트’의 가장 큰 장점은 조급하지 않다는 데 있다. 혜원에게 정답을 강요하지도, 관객에게도 교훈을 애써 전달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결말에서 혜원이 갑자기 성공하는 일도 없다. 시험에 합격하지도 않고,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지도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분명히 느낀다. 처음의 혜원과 마지막의 혜원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미래에 대한 답을 모두 얻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남들과 비교하며 조급해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돼간다.
여름의 들판이 하루아침에 푸르게 변하지 않듯, 사람의 성장 또한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이뤄진다. 경쟁 속 소모된 삶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변한 자연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시나브로 마모된 부분이 회복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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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포스터. 플레스엠 엔터테인먼트 페이스북 캡처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김태리·왼쪽)이 초등학교 동창인 은숙(진기주), 재하(류준열)와 대화하는 장면. 네이버 영화
만화 ‘리틀 포레스트’ 단행본 표지. 이가라시 다이스케 X 캡처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겨울, 봄’ 편(왼쪽)과 ‘리틀 포레스트 가을, 여름’ 편의 포스터. 영화사 진진 X 캡처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식사하는 장면.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