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8년 종전선언을 거듭 요구했다.4·27 남북 판문점선언 때 종전선언 추진을 합의하고,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직후 북한은 종전선언을 미북 간 신뢰 구축을 위한 미국의 ‘상응조치’로 요구했다.
이어 7월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 당시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인 7월 27일을 계기로 종전선언을 발표하자고 미국 측에 제안했다. 이후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 관영매체까지 나서 종전선언을 ‘평화보장의 첫 공정’, 미북 간 신뢰 조성을 위한 ‘선차적 요소’라며 미국을 거듭 압박했다.
하지만 이제 북한은 종전선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10년간 핵탄두 소형화와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기술을 개발하면서 '핵보유국' 지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과 달리 핵 능력에서 확실한 비대칭 우위를 확보한 북한이 별다른 비핵화 조치 없이 종전선언까지 얻어낼 경우, 한반도 안보의 균형이 더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쟁이 끝났다’는 명분을 앞세워 한미연합훈련과 미국 전략자산 전개를 문제 삼고, 나아가 주한미군과 유엔군사령부의 존재 명분까지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연합훈련 자료 사진.■"전쟁 끝났는데 왜 훈련?"…한미연합훈련 중단 명분종전선언으로 북한이 기대할 수 있는 첫 번째 효과는 한미연합훈련을 비롯한 미국의 대북 군사활동을 문제 삼을 정치적 명분이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될 때마다 이를 ‘북침전쟁연습’이라고 주장하며 중단을 요구해왔다. 미 전략폭격기와 핵추진항공모함 등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역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규정해왔다.
종전선언이 이뤄질 경우 북한은 ‘전쟁을 끝냈는데 전쟁을 전제로 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왜 계속하느냐’는 논리를 펼 수 있다. 실제 2018년 종전선언 논의 과정에서도 ‘적대관계 청산’에 뒤따를 조치로 한미 군사훈련·연습 중단과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인근 배치 중단 등이 거론됐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단순한 상징적 행사라기보다 미국의 ‘적대시 정책’ 전환을 확인하는 첫 조치로 규정했다. 2018년 7월 외무성은 종전선언을 미북 신뢰 구축의 ‘선차적 요소’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이를 미루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종전선언만으로 한미연합훈련이 법적으로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전 이후에도 기존과 같은 규모와 방식으로 훈련이 계속될 경우 북한이 이를 ‘종전선언 정신에 어긋나는 적대행위’로 규정하면서 축소·중단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유엔군사령부. DB■주한미군·유엔사 존재 명분 약화두 번째는 주한미군과 유엔군사령부다.
물론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종전선언이 곧바로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지 않는다. 김정은도 종전선언을 강하게 요구하던 2018년 9월 평양을 찾은 우리 측 대북특사단에 “한미동맹이 약화한다거나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은 종전선언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미연합훈련과 마찬가지로 '적대관계 해소'를 명분으로 얼마든지 규모 축소와 활동 제한을 요구할 수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창설된 유엔사의 경우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현재 유엔사의 핵심 임무 가운데 하나가 정전협정 유지·관리다. 국방부도 과거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유엔사의 법적 지위가 자동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유엔사의 존재 명분이 약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북한은 실제로 유엔사 해체를 장기간 요구해왔다. 북한은 2013년 외무성 비망록을 통해 유엔사 해체를 주장했고, 2017년에는 대외선전단체 담화를 통해 “유엔군사령부는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없다”며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를 동시에 요구했다.
종전선언을 강하게 요구했던 2018년 10월 북한 유엔대표부 관계자는 유엔총회 제6위원회에서 유엔사를 ‘괴물과 같은 조직’이라고 비난하며 조속한 해체를 요구했다. 북한은 그해 11월에도 유엔사가 남북관계에 개입하고 있다며 다시 해체를 주장했다.
■미북수교 첫 단추
세 번째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다.
북한은 2018년 종전선언을 요구하면서 이를 미북 간 신뢰 구축을 위한 첫 단계로 규정했다. 종전선언을 통해 6·25전쟁 이후 이어져온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정치적으로 먼저 끝낸 뒤 평화협정과 미북 관계 정상화로 나아가겠다는 구상이었다.
미북수교는 북한에 단순히 대사관 하나를 설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미국이 북한을 외교적 협상 상대를 넘어 정상적인 국가 관계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연락사무소 설치와 외교관계 정상화, 제재 완화 등으로 이어질 경우 북한의 오랜 외교적 고립을 깨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2018년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미군 유해 송환 등의 조치를 취한 뒤 미국에 종전선언을 거듭 요구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먼저 조치를 취했으니 미국 역시 적대관계 청산을 보여주는 조치를 내놓아야 한다는 ‘행동 대 행동’ 논리를 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가 부족한 상황에서 종전선언을 먼저 해줄 경우 협상력을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종전선언에 반대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종전선언 요구 사라진 北… 이제는 왜 급하지 않나
하지만 최근 북한에서 종전선언 요구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2018년에는 외무성과 노동신문, 대외선전매체가 거의 연일 종전선언을 요구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국가전략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은은 2023년 말 남북관계를 더 이상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니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했다. 이후 통일 관련 기구를 폐지하고 한국을 별개의 적대국으로 취급하는 방향으로 대남정책을 전환했다.
특히 2019년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핵을 협상해 경제적 보상을 얻는 노선을 바꿨다. 핵무력을 국가안보의 핵심으로 고착시키는 한편 러시아와 군사·경제 협력을 크게 확대했다.
북한이 2018년엔 종전선언을 미국의 적대시 정책 변화와 관계 정상화를 끌어내는 첫 번째 카드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면, 현재는 핵보유국 지위를 전제로 미국과 장기 대결을 벌이고 한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신다윗 한국국방연구원(KIDA) 안보전략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TV조선과의 통화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2018년보다도 크게 후퇴한 상황에서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 없이 종전선언부터 추진할 경우, 북한의 핵 위협은 그대로 둔 채 한미의 연합방위태세만 약화시키는 안보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