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싸움을 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보다 앞서기 위해 경쟁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기도 한다. 꼭 악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혹은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부딪힌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마음 한쪽이 불편해지는 날이 있다. 조금 심하게 말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가 내린 선택 때문에 상처받았을 누군가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작은 선택에도 죄책감이 남는다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선택을 내려야 했던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누군가의 결정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은 그 죽음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밤마다 자신이 내린 결정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할까. 영화 <오디세이>를 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전략가 오디세우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보여주는 그의 긴 귀환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모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돌아가기가 두려웠던 건 아닐까.
[첫 번째 감정] 오디세우스의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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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오디세이> |
| ⓒ 유니버설 픽처스 |
오디세우스(맷 데이먼)는 영웅이다. 뛰어난 전략가였고, 오랫동안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 역시 그의 지략을 상징한다.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이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이타카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귀환에는 다시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집 주변을 돌고 돌아 수많은 죽음과 고통을 다시 경험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긴 시간이 죄책감처럼 느껴진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적군만 죽은 것도 아니다.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동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자신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그 죽음들 앞에서 그는 계속 선택해야 한다. 누구를 살릴 것인지, 누구를 포기할 것인지. 전략가에게는 하나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는 언제나 사람의 목숨이 놓여 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어쩌면 집에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타카에는 너무나 사랑하는 페넬로페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쟁터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 가족이 기억하는 남편과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겠지만, 전쟁터의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기도 했다. 영웅의 모습으로 귀환하고 싶었겠지만, 자기 눈에는 피를 뒤집어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그의 방황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신들이 그의 앞길을 막고, 바다는 거칠어지고, 괴물과 죽음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온다. 그것은 신들의 저주이면서 동시에 오디세우스가 스스로에게 내린 벌처럼 느껴진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마음속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몸은 트로이를 떠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오디세우스에게 필요했던 10년은 이타카까지 가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가족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감정]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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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오디세이> 장면 |
| ⓒ 유니버설 픽처스 |
오디세우스가 20년 동안 집을 비운 사이, 페넬로페(앤 해서웨이)는 그를 기다린다. 생각해 보면 20년이라는 시간은 믿음이라는 말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다. 살아 있다는 확신도 없고, 언제 돌아온다는 약속도 없다. 주변에는 계속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쉽게 놓지 않는다.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단순히 사랑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페넬로페가 기억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무너뜨린 전쟁 영웅이기 전에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지혜롭고 강하지만 전쟁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올 사람. 페넬로페는 세상이 알고 있는 영웅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인간을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의 믿음은 조금 다르다. 그에게 아버지는 기억보다 이야기에 가까운 존재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을 떠났을 때 그는 너무 어렸고, 자신이 직접 기억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들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텔레마코스에게 오디세우스는 실제 사람인 동시에 하나의 전설이 된다. 어쩌면 페넬로페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아버지가 없는 시간을 채워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사람이 기다리는 오디세우스와 실제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 사이에는 긴 시간만큼의 거리가 있다. 그들이 기다렸던 것은 전쟁 영웅이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였다. 반면 돌아오는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죽음과 죄책감을 짊어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오디세우스가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결국 돌아갈 사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세 번째 감정] 아르고스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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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오디세이> 장면 |
| ⓒ 유니버설 픽처스 |
그리고 이 긴 이야기에서 이상하게 가장 마음에 남는 존재가 있다. 오디세우스의 사냥개 아르고스다. 인간들은 오디세우스를 전쟁 영웅이라고 부르고, 왕이라고 부르며, 그의 귀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계산한다. 하지만 아르고스에게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그저 자기 주인을 기다린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어린 텔레마코스는 어른이 되었고, 오디세우스의 궁전에는 페넬로페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아르고스 역시 늙고 지쳤다. 제대로 돌봄도 받지 못하고 구혼자들에게 구박받으면서도 성문 근처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감춘 채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가장 먼저 알아본다. 세상 사람들이 영웅의 모습만을 기억할 때, 늙은 개 한 마리만이 그 안에 있는 오디세우스를 알아본다.
그래서 나는 아르고스가 어쩌면 오디세우스에게 가장 작은 신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바다를 움직일 수도 없고, 번개를 내릴 수도 없으며, 오디세우스를 위험에서 구해줄 수도 없다. 그저 아주 먼 곳에서 자신의 주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신은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디에 있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존재,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알아봐 주는 존재.
오디세우스가 다시 아르고스를 바라보는 순간은 그래서 수많은 전투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도 아니고, 수많은 괴물을 이겨낸 전략가도 아니다. 아르고스 앞에서 그는 그저 오래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주인이다. 어쩌면 오디세우스의 진짜 귀환은 이 순간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다시 알아봐지는 순간, 그는 비로소 전쟁 영웅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매일 작은 전쟁에서 돌아온다
<오디세이>는 신과 괴물, 전쟁과 모험이 등장하는 거대한 서사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이상하게 내 삶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우리는 트로이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괴물과 싸울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역시 매일 자신만의 작은 전쟁터로 나간다.
아침이면 집을 나서 회사에 가고, 사람들과 경쟁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싸운다. 어떤 날에는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내고,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기도 한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는 순간도 있다. 그리고 퇴근길이 되면 다시 집으로 향한다. 몸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마음까지 깨끗하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에는 분노를 들고 돌아오고, 어떤 날에는 슬픔을 들고 돌아오며, 또 어떤 날에는 작은 죄책감을 품고 돌아온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그렇게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역시 매일 싸우러 나갔다가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를 믿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반겨주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하루를 견디고, 다음 날 또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 오래된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진중한 대서사시로 만들어낸다. 고대 신화를 현대적으로 가볍게 변형하기보다, 거대한 자연과 인간의 육체를 스크린 위에 직접 부딪치게 한다. 특히 아이맥스 카메라로 담아낸 바다와 전쟁, 배와 인간의 모습은 압도적이다. CG에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 실제 공간과 세트, 배우들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정말 오래전 세계 어딘가에 서 있는 듯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신화 속 이야기를 보고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놀런의 영화와 <오디세이>라는 이야기가 잘 어울리는 이유도 분명하다. 시간과 기억, 죄책감, 집으로 돌아가려는 인간. 생각해 보면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 속 인물들 역시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고 다시 돌아가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서양 문학의 가장 오래된 귀환 서사 가운데 하나로 확장한다. 이제는 놀런이 만들지 못할 장르가 무엇인지 오히려 궁금해질 정도다.
배우들의 연기도 이 거대한 세계를 현실에 붙잡아둔다. 맷 데이먼은 오디세우스를 단순한 전쟁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지혜롭고 강한 얼굴 뒤에 피로와 후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함께 담아낸다. 앤 해서웨이는 긴 세월을 견뎌온 페넬로페의 단단함을 보여주고, 톰 홀랜드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를 기다리며 성장한 텔레마코스의 복잡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지만 결국 끝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배우들의 얼굴이다.
결국 <오디세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이 아니다. 밖에서 묻혀온 분노와 상처, 죄책감을 안고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는 그렇게 멀리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다 건너에 있어서가 아니라, 다시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도 오늘도 하루의 작은 전쟁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어떤 날에는 자랑스럽게 돌아가고, 어떤 날에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채 문을 연다. 그래도 그곳에 나를 기다리고, 믿어주고, 오래 지나도 알아봐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집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싸우고 돌아왔든,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 오디세우스가 10년 동안 바다를 헤매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이타카라는 섬이 아니라,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