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7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부근에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상장 폐지를 촉구하는 근조화환이 설치돼 있다. |
| ⓒ 연합뉴스 |
코스피 지수는 이재명 대통령 취임일인 2025년 6월 4일에 2770.84(마감 종가)였다가 지난 5월 15일에 장중 8000을 넘었다. 한동안은 정부의 홍보 대상이었던 이 지수는 폭등과 폭락이 반복되고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레버리지 ETF 등으로 피해가 늘어나면서 지금은 정권에 부담을 주고 있다. 대통령 지지율이 45.9%로 집계된 지난 3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지율 하락의 주된 요인은 증시 폭락과 레버리지 ETF 파장이다.
과거의 군주들은 강우량에 항상 신경을 썼지만, 오늘날의 대통령들은 증시 문제에 고도의 주의를 기울인다. 1960~2011년 기간의 '급격한' 주가지수 변동이 미국 대통령 지지율에 영향을 줬다는 학술 논문도 있다.
네덜란드에서 발행되는 <선거학> 2013년 제32권 제3호에 실린 크리스틴 포벨 에마르 프랑스 투르대학 교수와 메리 스테그마이어 미국 미주리대학 교수의 논문인 '주식시장과 미국 대통령 지지율'은 "주식시장 지수의 급격한 하락은 대통령 지지율을 감소시키는 한편, 이 지수 상승의 급격한 가속화는 미국 대통령 지지율을 증가시켰다"고 말한다.
한국의 상황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김영삼 정부 1년 차인 1993년 3월부터 문재인 정부 3년 차인 2019년 5월까지의 기준금리·근원인플레이션율·실업률·경제성장률·코스피 변동과 대통령 지지율 변동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제주대 배형석·양성국의 논문에서 그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목이 '한국 대통령 지지율과 경제변수'인 이 논문은 "사회구성원들의 체감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물가와 금리 수준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평가가 지지율에 반영되는 것으로 나타난 반면, 나머지 변수에 대해선 그 유의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기술한다. 물가나 금리가 오르면 곧바로 나랏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지만, 취업이 안 되거나 경제성장이 정체되거나 주식 투자가 여의치 않다고 해서 곧장 청와대로 고개를 돌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증시 문제는 이따금 한 번씩 한국 정권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인한 1997년의 증시 폭락은 김대중이 당선된 그해 12월 대선에 영향을 끼쳤다. 박정희 군사정권하에서 벌어진 1962년의 증권파동은 군사정권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키고 정권 2인자 김종필이 일종의 희생양이 되어 '제1차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나게 만들었다.
재정 확충 방안이 증권 위기 원인
증시 문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증권시장은 주식보다는 국채를 중심으로 작동했다. 대한증권거래소 개장(1956.3.3.) 얼마 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1956년 7월 14일 자 <경향신문>은 "증권거래시장은 발족 후 수개월 동안에 국채가 투자 대상으로써, 증권시장의 총매매거래액의 70%를 점하여"라고 보도했다. 바로 이 국채 문제는 이승만 정부의 증시관리 능력을 노출하는 무대가 됐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이승만 정부는 미국 유학 시절인 1933년부터 이승만과 함께 활동한 김현철 부흥부 장관을 재무부 장관으로 재기용했다(1957.6.9.). 바로 이 김현철 장관의 재정 확충 방안이 증권 위기를 낳는 원인이 됐다.
그해 9월 14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재무부는 종전 최고 기록인 150억 환을 능가하는 180억 환을 조달하기 위한 제11차 건국국채 발행 동의안을 그달 13일 국회에 제출했다. 1957년도 국가 예산은 2185억 환이었다. 1년 국가 예산의 8%를 넘는 거액을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9월 20일, 재무부는 재정 확충을 위한 또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외환거래에 대해 특별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그해 10월 6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재무부는 외환특별세법을 통해 1958년 한 해 동안 153억 환을 조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규모 재원 조달을 위한 조치를 연달아 내놓은 일은 증권가를 고민에 빠트렸다. 153억 환을 특별세를 통해 조달할 수 있다면 굳이 국채를 뭐 하러 발행하겠는가, 180억 환 규모의 국채가 정말로 발행되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초래했다.
이는 증권가를 양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화증권·내외증권·대창증권 등은 국채 발행이 무산되는 쪽에, 천일증권·태평증권·상호증권 등은 국채 발행이 성사되는 쪽에 베팅했다. 전자는 제11회 국채 발행이 무산되면 직전 발행분인 제10차 국채의 가격이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하에 이 국채를 대량 매입했다. 재무부의 두 조치로 인해 증권가에서 투기적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무산' 쪽은 떼돈을 벌였다. 9월에 16~17환 정도였던 제10차 국채는 12월에 40환대로 폭등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했다. 12월 31일, 국회는 180억 규모의 제11차 국채를 발행하는 데 동의했다. 이는 제10차 국채의 폭락을 초래했다. 1958년 1월 9일, 이 국채는 24환까지 폭락했다.
그러자 '무산'은 가격 폭락을 막고자 매수 작전에 나섰다. 이로 인해 1월 15일에는 38환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6일 오전에는 다시 28환으로 떨어졌다. '무산'은 다시 매수에 나서 그날 장이 45환으로 마감되도록 만들었다. 잘못된 예측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된 투기 세력이 손실을 피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서 롤러코스터 장세가 반복됐다.
1957년 10월 1일 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국채의 하루 거래대금은 3600만 환이다. 3일 자 기사에는 1억 4900만 환, 5일 자 보도에는 8100만 환으로 보도됐다. 그런데 롤러코스터 장세가 심각해지면서 거래량이 폭증했다. 1958년 1월 16일 거래대금은 42억 환이었다.
증권시장 살리기 위해 공적 자금 투입
|
| ▲ 1958년 1월 21일 자 <동아일보> 사설 "증권시장을 구제하라" |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거래량 폭증은 즉각적인 대금 결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대금 결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으로까지 거래가 과열됐다. 이는 '무산' 쪽 증권사들을 파산 위기로 내몰았다.
이 상황에서 김현철 재무부 장관이 1월 17일 긴급히 '칼'을 꺼내 들었다. 1958년 1월 16일의 증권 거래를 모두 취소한다는 극약 처방이었다(1·16 국채파동). 증권시장 시스템이 마비될 위기가 나타나자, 정부가 칼을 뽑아 그날 하루의 거래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증권사 파산을 막고 증권시장을 살리기 위해 공적 자금까지 투입해야 했다.
신규 국채 발행과 외환특별세법 입법의 동시 추진이 증권가의 오해를 낳고 이것이 투기적 조짐으로 연결되는데도 정부는 선제적 대책을 준비하지 못했다. 국채 발행 동의안 통과를 계기로 널뛰기 장세가 나타나고 시장 과열로 인해 시스템이 마비될 조짐을 보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결국 국민 혈세를 동원해 사태를 무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이승만 정부의 증시 관리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확산시켰다. 그해 1월 21일 자 <동아일보> 사설은 "증권시장을 구제하라"고 촉구하면서, 사태를 방치하면 "대한민국정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50년에 발행된 제1회 건국국채는 40만 호에 배당됐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관련된 국채 시장을 이승만 정부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혼란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5·2 총선 직후인 1958년 5월 6일 발행된 <동아일보>에는 '증권계의 혼란'이라는 제목하에 증권거래소가 혼란 수습책을 재무부에 요구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1954년 총선에서 민주국민당(민주당)이 도시 지역에서 획득한 의석은 10석이다. 그런데 1958년에는 여소야대 양상이 명확히 나타났다. <국사관논총> 1991년 제27집에 실린 안병만 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자유당 정권 연구'는 "(1958년에) 자유당은 126석을 차지하였지만, 서울시 이외의 26개 시(市) 지역에서 당선된 것은 13석에 불과했고, 민주당의 79석 중 43석은 도시 지역에서 당선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국채 파동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자유당은 1석밖에 얻지 못했다. 국채 파동이 여소야대의 결정적 원인이었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국채 파동에 특히 민감한 도시 지역에서 자유당이 참패한 데는 그 영향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 힘들다.
1·16 국채 파동은 이승만 정권이 폭력적이고 독재적일 뿐 아니라 무능하기까지 하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증권시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집권기에도 증시 문제가 제한적으로나마 '강우량'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