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에 사고 환호할 때 파는 투자, 인간 본능상 쉽지 않아
외환위기·닷컴버블·금융위기에도 꾸준한 적립식 투자 성과
TDF·ETF 정기매수·로보어드바이저로 감정 개입 줄여야한국경제신문의 투자 전문 유료 플랫폼 '한경 프리미엄9'(www.hankyung.com/premium9)에 실린 기사입니다. 한경 프리미엄9을 구독하시면 더 많은 주식 투자 기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 사진=게티이미지뱅크‘싸게 사서 비싸게 팔기’. 모든 투자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매매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실천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투자의 구루들이 한목소리로 강조하듯 남들이 모두 비관에 빠졌을 때 용기 내 매수하고, 모두가 열광할 때 냉정하게 팔아야 싸게 사서 비싸게 팔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행동이 인간의 본성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공포를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도록 진화했다. 시장이 급락해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주식을 사고, 주가가 치솟아 주변 모두가 돈을 벌었다고 환호할 때 주식을 파는 것은 본능적으로 쉽지 않다. 이상적인 매매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이유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국내 증시 랠리에 뒤늦게 동참했다가 손실을 보고 있는 투자자도 적지 않다. 고점에서 팔지 못했다고 지나치게 자책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에 충실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다. 다음에 또 폭풍 같은 장세를 만났을 때 어떻게 손실을 최소화하고 자산을 지킬 것인가다. 특히 근로자가 직접 운용해야 하는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이나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에서 투자하고 있다면 반드시 고민해야 할 문제다. 노후자금을 불리는 것만큼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의 투자 기간은 길다. 수십 년 동안 투자하다 보면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코로나19와 같은 다양한 위기를 만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견디면서 퇴직연금을 지키고 키울 현실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이미 검증된 원칙이 있다. 자산배분이 잘된 상품을 정기적으로 사는 적립식 투자를 꾸준히 지속하는 것이다. 국내외 여러 투자 대상에 자산을 고르게 배분하고 시장 상황에 따라 잦은 매매를 하지 않는 방식이다.
사진=게티이미지최근 금융시장에는 이런 원칙을 감정 개입 없이 실행할 수 있도록 돕는 퇴직연금 상품과 서비스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투자자의 연령과 은퇴 시점에 맞춰 알아서 자산을 배분하는 타깃데이트펀드(TDF)가 대표적이다. 시장 대표지수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를 매달 자동으로 사는 정기매수 서비스도 있다.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시장 상황에 따라 자산 비중을 알아서 조정하는 로보어드바이저도 활용할 수 있다.자동화 시스템을 이용해 편하게 투자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의구심을 갖는 투자자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매수 타이밍에 대한 두려움이다. ‘매달 자동으로 사면 좋은 매수 시점을 놓치는 것 아닐까’, ‘시장이 계속 떨어지는데 하락장에서 매수를 이어가면 수익률이 더 나빠지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하지만 실제 데이터가 보여주는 결과는 다르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는 과거 외환위기와 닷컴버블,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등 극심한 위기 국면에서 S&P500과 코스피지수에 적립식으로 투자했을 때의 성과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하락장에서도 적립식 매수를 꾸준히 이어간 경우 중간에 매수를 멈추거나 목돈을 한꺼번에 넣어두는 거치식 투자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주가가 떨어질 때도 같은 금액으로 투자를 이어가면 더 많은 주식이나 펀드를 살 수 있다. 이후 시장이 회복하면 하락장에서 낮아진 평균 매입단가가 수익률 회복에 도움을 준다.
투자 기간이 길어질수록 매수 타이밍의 중요성이 낮아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적립식 투자는 투자 기간이 짧을 때는 언제 매수를 시작했느냐에 따라 수익률 편차가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투자 기간이 길어질수록 매수 시점이 전체 수익률에 미치는 영향은 줄었다.
수십 년에 걸쳐 투자하는 연금에서는 시장의 고점과 저점을 맞히려는 노력의 의미가 시간이 흐를수록 작아진다는 얘기다. 단기적인 시장 전망에 따라 투자를 중단하거나 재개하기보다 정해진 원칙에 따라 꾸준히 투자하는 것이 장기 성과에는 더 중요할 수 있다.
자동화를 주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심리도 있다. ‘시스템에 맡기는 것보다 내가 직접 투자하는 게 더 좋은 성과를 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완제품 가구보다 직접 조립한 가구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자신이 직접 구성한 포트폴리오에 더 강한 애착과 통제감을 느끼는 이른바 ‘이케아 효과(IKEA Effect)’다.
직접 투자하면서 좌충우돌하고 경험을 쌓는 과정도 소중하다. 시장을 공부하고 자신만의 투자 원칙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금융위기나 코로나19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공포와 탐욕에 휘둘리지 않는 자동화의 가치가 더 커질 수 있다.
퇴직연금은 단기간에 승부를 보는 투자가 아니다. 시장의 고점과 저점을 매번 정확하게 맞히기보다 자산을 분산하고 정기적으로 투자하면서 오랜 기간 시장에 남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이 흔들릴 때도 투자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자동화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 장기 노후자금을 지키고 키우는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오현민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수석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