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워시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지난달 29일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연방준비제도의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지표가 최근 잇달아 발표됐음에도 미국 국채 금리가 장기물을 중심으로 오히려 급등하는 이례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지난 14일 30년 만기 미 국채 금리는 연 5.25%로 전일보다 0.04%포인트, 한 달 전과 비교하면 0.17%포인트 상승해 거래를 마쳤다. 17일엔 5.31%로 더 올랐다. 지난달 29일 기준금리를 동결한 연준 회의 직후 회견에서 케빈 워시 의장이 “앞으로 금리를 안내하지 않고 시장에 맡기겠다”고 강조하자 급등했던 금리가 내려오지 않는 모습이다.
미국 장기 국채는 미 주택 대출 금리와 직결되며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 자본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금리가 오르면 가계 대출이 세계 최대 수준으로 불어난 동시에 주식 시장이 요동치는 한국에도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 한국의 30년 만기 국채 금리도 최근 미국과 동반 급등해, 발행을 시작한 2012년 9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한편에선 미 장기 국채 금리 상승이 소극적으로 변한 연준보다는 미국 재정 불안, 국채 수요 감소 같은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서 기인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경제 지표 모두 ‘동결’ 무게에도 금리 진정 안 돼
지난달 연준 기준금리 결정 회의 후 약 보름 동안 발표된 경제 지표 중엔 연준의 금리 인상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결과가 많았다. 7월 취업자 수는 증가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2만3000명 줄었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대비 3.4%로 전월 3.5%보다 내려갔다. 증가가 예상됐던 소매 판매는 역으로 전월보다 0.6% 감소했다. 중동 전쟁 장기화 및 미국 관세 인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가 다소 낮아진 반면 고용·소비는 부진해질 가능성을 시사하는 신호들이다. 연준이 서둘러 기준금리를 올릴 필요성을 줄이는 지표들이기도 하다.
그 결과 채권 시장 움직임으로 연준 기준금리 향방을 전망하는 시카고상품거래소 ‘페드워치툴’의 9월 금리 인상 가능성은 지난 10일 44%에서 17일 33%로 낮아졌다. 하지만 미 장기 국채 유통 금리는 반대로 상승(채권 가격 하락)하면서 시장엔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워시 회견 도중 급등해 5.2% 선을 넘어선 다음 더 올라간 상태고 10년 만기 금리도 4.68%로 상승했다. 모두 연준이 기준금리를 빠르게 올리던 2007년 이후 최고치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유통 금리가 오르며 발행 금리까지 급등하는 모습이다. 13일 250억달러 규모의 30년 만기 미 국채 신규 발행 입찰 금리는 연 5.22%로 2001년 8월 이후 최고치로 치솟았다.
워시 취임 세 달, 채권 시장은 ‘발작’
채권 시장의 혼란을 야기한 원인 중 하나로는 오는 22일로 취임 세 달째를 맞는 워시 의장이 지목된다. 과거부터 연준의 영향력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밝혔던 그는 지난달 간담회에서 “2%라는 인플레이션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면서도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연준이 움직이지 않았더니 시장이 적정 금리를 찾아가고 있다” “떠먹여주는 연준을 기대하지 말라” 같은 발언 또한 인플레이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워시의 설명은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관망할 수 있다는 신호로 풀이되며 장기 채권 금리를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연준 금리 발표 때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채권 금리는 회견이 진행되는 한 시간 동안 ‘발작’ 수준으로 가파르게 치솟았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소극적 연준’이 초래할 인플레이션 우려가 시장을 좌우하고 있다는 증거는 단기와 장기 채권 금리의 분리된 움직임에서도 드러난다. 지난달 29일 연준 회의 후 보름간 장기채인 만기 10년·30년 금리는 올라갔지만 단기 채권인 만기 3개월·2년 금리는 하락했다.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난달 28일 연 5.09%에서 5.25%로, 10년 만기 국채도 4.61%에서 4.68%로 상승했다. 반면 만기가 비교적 짧은 3개월, 2년짜리 국채 금리는 0.04%포인트, 0.09%포인트씩 하락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장기 국채 금리는 미래에 물가가 많이 오르리라는 전망이 커지면 상승한다. 물가가 상승해 ‘돈값’이 하락하면 만기가 길수록 손해라, 더 높은 금리를 줘야 채권이 팔리기 때문이다. 반면 단기 국채 금리는 물가 전망보다는 연준의 기준금리 등락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박준우 하나증권 연구원은 “연준의 긴축 불안이 잦아들며 단기 금리가 내려갔지만 워시가 기준금리 인상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물가 안정 기대가 약화되며 장기 금리는 상승하는 모습”이라며 “‘연준이 긴축해야 인플레이션이 안정될 것’이라는 신호를 시장이 보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워시가 묵언(默言)을 이어가는 가운데 시장의 시선은 오는 27~29일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열리는 세계 중앙은행장 회동인 ‘잭슨홀 회의’에 쏠리고 있다. 워시가 시장을 안정시키는 발언을 할지는 미지수다. 회견에서 워시는 잭슨홀 회의 구상에 대해 “완전한 백지 상태”라며 과거 연준 의장들처럼 잭슨홀 회의를 연준의 기조를 공표하는 계기로 삼을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워시보다 ‘빚더미’ 미국 정부가 문제”
급등하는 장기 채권 금리는 빚을 계속 늘리고 있는 미국 정부·기업·가계에 모두 부담이다. 미 연방 정부 부채는 약 40조달러로 이자 상환액만 하루 30억달러, 연간 1조달러에 달한다. 국채 금리 상승은 회사채에도 전이되기 때문에 AI(인공지능) 관련 투자를 늘리느라 막대한 자금 조달에 열을 올리는 빅테크 기업에도 악재다. 장기 국채 금리에 연동되는 30년 만기 미국 모기지(장기 주택담보대출) 금리 또한 연 6.67%로 올라, 연준이 세 차례 금리를 인하하기 전이었던 지난해 8월 초 수준을 넘어서며 가계에도 부담이 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미국 경제가 붕괴하면 워시는 나설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워시는 시장이 자신의 긴축 정책을 대신 실행하도록 유도해 금리 인상을 피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장기 채권 금리 상승은 워시 의장의 ‘실험’이 실패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했다.
반면 일부 전문가는 최근 장기 국채 금리 상승의 책임을 워시에게만 돌리기는 무리라고 진단한다. 한 채권 트레이더는 “막연한 인플레이션 우려 변수보다는 미국의 막대한 국가 부채와 재정 적자 같은 실질적 위험이 장기 국채 금리 급등을 초래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며 “연방 정부의 채권 수요가 계속 늘어남에도 이를 사줄 주체는 적어지고 있다는 근본적인 수급 불균형이 시장엔 더 큰 부담”이라고 했다.
실제로 미 국채를 흡수했던 주요국 중앙은행과 미국의 대기업은 전만큼 미 국채를 사지 않는 모습이다. 중국 등 미국과 분쟁을 벌이는 나라들이 미 국채를 내다 파는 동시에 우방인 일본까지 환율 방어를 위해 국채를 매도하면서 해외 기관의 미 장기 국채 보유액은 전년 말 대비 37억3000만달러 줄었다. 한때 ‘현금성 자산’을 대규모로 쌓고 그중 상당수를 미 국채로 채웠던 빅테크 기업 또한 상황이 달라졌다. 설비 투자에 큰돈이 투입되는 AI 경쟁이 격화하면서 국채를 사기는커녕 채권을 발행해 돈을 빌려 써야 하는 입장이 됐다.
구글이 호주 크론스토르프에 건설 중인 새 데이터센터의 지난 13일 모습. 구글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은 한때 미 국채를 많이 사주던 '큰 손'이었으나 최근 들어 AI 데이터센터 건설 등에 많은 돈이 필요해지면서 오히려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주체가 되었다. /로이터 연합뉴스2023년 말 1110억달러에 달했던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현금성 자산은 지난 2분기 말 기준 559억달러로 반 토막이 났다. 같은 기간 메타의 현금성 자산도 356억달러에서 155억달러로 감소하는 등 빅테크 기업이 ‘국채 큰손’으로 국채 수요를 지탱해주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오건영 신한 프리미어 패스파인더 단장은 “과거 미국 국채를 많이 사주던 일본 등의 중앙은행이 미국의 국채를 파는 가운데 채권 시장의 큰손이었던 빅테크 기업까지 채권을 자체 발행하는 상황이 일어나는 중”이라며 “연준의 존재감을 줄이겠다는 워시의 기조가 채권 시장의 이 같은 수급 변화와 겹치면서 장기 국채 금리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