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포 시제품 6문 수주 계약
K방산 완성무기 최초 美수출
양산 계약땐 10조 수주 기대
김승연·김동관 2대 뚝심 결실
국방과학연구소 시험장에서 K9 차륜형 자주포(K9MH) 사격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국산 자주포가 세계 최강 미군의 안방에 진입했다. 76년 전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게 포병 지원을 받았던 한국이 이제 미국에 자주포를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미 육군이 30년 가까이 자체 개발에 실패하며 골머리를 앓던 자주포 시장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글로벌 방산 공룡들까지 제치고 9년에 걸친 뚝심 영업으로 뚫어냈다.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미국 자회사 한화디펜스USA가 미 육군과 K9 차륜형 자주포(K9MH) 시제품 6문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19일 밝혔다. 한국 방산업계가 미국 본토에 부품·모듈이 아닌 완성형 무기체계를 공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 육군에 따르면 계약 이행 기간은 최대 4년으로, 시제품 6문을 우선 납품하고 추가 12문을 도입할 수 있는 옵션이 포함됐다. 계약 금액은 1억30만달러(약 1417억원)이며 옵션까지 모두 실행돼 총 18문을 도입하면 누적 액면가는 2억6290만달러(약 3715억원)로 늘어난다.
미 육군은 해당 기간 작전 운용 개념에 맞춰 세부 조건을 보완한다. 통상적으로 미군은 이러한 조정 기간을 거친 후 특별한 결함 내지 결격 사유가 없으면 최종 양산 계약을 체결한다. 이번 사업으로 대체되는 미 육군의 노후 M777 견인포 교체 물량은 500문 안팎이며 양산 계약만 약 1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일각에선 탄약·부품 공급, 군수지원(MRO) 패키지를 더하면 실제 사업 규모가 더 커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K9MH는 세계 시장에서 검증된 K9 자주포의 155㎜ 화력체계를 차륜형 플랫폼에 얹은 모델이다. 전차에 쓰이는 무한궤도 대신 자동차 바퀴를 달아 최고 속도 시속 100㎞, 작전 거리 700㎞의 도로 기동성을 확보했다. 자동화 포탑과 자동 장전장치를 적용해 1분당 8~9발의 사격 속도를 내며, 승무원도 2~3명으로 줄여 인력 부담을 낮췄다.
이번 수주는 미 육군의 뼈아픈 개발 실패 역사의 빈틈을 한화가 전략적으로 파고든 결실이란 분석이다. 미 육군은 1994년 크루세이더, 2009년 NLOS-C, 2018년 ERCA까지 세 차례 자체 개발을 시도했지만 모두 좌초했다. 크루세이더는 전략적 불필요성으로, NLOS-C는 미래 전투체계 재편으로 접었다. 사거리를 70㎞까지 늘리려던 ERCA는 포신 마모 문제로 2024년 중단됐다.
김승연 회장한화는 2017년 워싱턴 방산전시회(AUSA)에 실물 K9을 처음 선보인 뒤 매년 장비를 전시하며 현지 인지도를 높였다. 2022년 유마 사격장에서 미국산 포탄 호환성을 증명했고 2024년엔 정밀유도포탄 엑스칼리버 발사 성능까지 입증했다. 신뢰를 쌓은 한화는 2024년 8월 미 육군의 정보요청서(RFI)를 받았고 2년 만에 계약 결실을 봤다.경쟁자들 면면을 보면 이번 수주의 의미는 더욱 값지다. 한화는 유럽 최대 방산기업으로 떠오른 독일 라인메탈, 미 육군 기존 자주포(M109 팔라딘) 사업자였던 영국 BAE시스템스를 밀어냈다. 여기에 이탈리아 방산 명가 레오나르도와 기업가치 610억달러(약 84조원)에 달하는 미국 실리콘밸리 방산 유니콘 안두릴(엘빗 아메리카 컨소시엄)까지 제쳤다. 전통 화력체계 분야에서 검증된 한국의 제조·기술 경쟁력이 유럽 전통 강자와 미국 신흥 테크 강자를 모두 압도한 셈이다.
한화는 미국 현지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한화디펜스USA는 지난 4월 말 앨라배마주 오펠리카 유휴 공장을 3년간 임대해 K9 계열 통합·시험시설로 활용하기로 했다. 단계적으로 생산 능력을 확대해 현지 생산체계를 갖추는 것이 목표다.
김동관 수석부회장.이번 쾌거 뒤에는 한화그룹 오너가의 2대에 걸친 방산 육성 의지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승연 회장은 방산을 국가기간산업으로 키워야 한다는 신념을 오랫동안 강조해 왔다. 2000년대 초 천무 다연장로켓 독자 개발 당시에도 “실패해도 좋다. 자주국방을 위한 기술은 남을 것”이라며 매몰 비용 우려를 무릅쓰고 투자를 밀어붙였다.김동관 수석부회장은 2014년 삼성테크윈, 이후 두산DST를 인수해 지금의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기반을 다졌다. 2024년 3월 미 육군의 차륜형 자주포 개발 동향을 포착하자마자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글로벌 방산·정부 출신 전문가를 대거 영입해 기민하게 대응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관계자는 “이번 계약은 한국의 무기체계가 미국을 지키게 되면서 한미동맹의 새 역사를 썼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차별화된 현지화 전략으로 미국에서도 안정적인 생산 기반을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