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정부의 '페이스메이커론'
북한은 외면, 트럼프는 '청구서' 날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9일 경북 경주시 힐튼호텔에서 APEC 리더스 실무협의 만찬을 갖기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경주=왕태석 선임기자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이 20일 한미 연합 군사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UFS)’ 일정이 절반으로 축소된 것을 두고 "인과응보" "허수아비 군대의 숙명"이라며 남한을 향한 조롱을 쏟아냈다. 북미 대화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자 한국을 미국과 분리해 대화 국면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최근 한미 이상기류와 맞물려 이재명 대통령이 북미 대화의 '페이스메이커'로서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김 부장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에 '그리도 즐겨하던 전쟁놀이를 못하게 된 서울의 가긍한 처지'라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했다. 김 부장은 "미 통수권자의 일방적인 지령에 따라 쌍방 간 조율도 없이 미군이 꼬리를 사려도 항변 한마디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지휘권을 상전에게 맡긴 허수아비 군대의 숙명"이라며 "단 한 번의 합동군사연습 축소에 국가안보가 통채로 흔들리는 나라가 바로 국방과 안보를 외세에 내맡기고도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차고 넘친다'고 자평하는 한국이라는 실체"라고 비꼬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훈련 축소 결정에 "경의를 표한다"고 한 이 대통령을 향해서는 "앞에서는 낯간지러운 소리로 아첨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자주국방과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를 운운한 리재명의 안팎이 다른 이중적 언행은 한국의 불안초조한 모순심리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대통령은 전날 "트럼프 대통령의 피스메이커 활동을 촉진하고 기여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김 부장의 이날 담화처럼 북한이 남한을 향한 비난을 지속하며 북미 대화 협의 과정에 한국의 배제를 요구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간 '직거래'로 전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는 저자세로 손을 내밀고 있는 동시에 한국에는 대미투자와 호르무즈해협 기여 등 '동맹 청구서'로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에 이어 19일에도 "한국이 호르무즈해협에서 우리를 돕는 데 관심이 없다고 말했을 때 기분이 별로였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을 두고 외신에선 한국의 대미투자 1호 프로젝트 발표 지연 등에 대한 불만이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한국이 소외된 채 북미 대화가 급물살을 탈 경우 떠안을 리스크가 크다는 점이다. 한국과의 사전 협의 없이 한미훈련 축소를 불쑥 던진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훈련 중단이나 주한미군 감축 등 북한에 양보 카드를 전격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 빠진 채 북미 협상이 이뤄진다면 북한의 핵보유국 고착화 우려도 나온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이를 "트럼프 리스크"라며 "미국이 한국의 안보 이해관계나 한미 동맹을 고려해 움직일 것이라고 전제해선 안 된다"고 했다.
신범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도 "트럼프는 대북 대화를 추동하면서 한국을 압박하는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다"며 "한미 핵심 갈등 요인인 대미투자를 신뢰 회복의 돌파구 삼아 대북 대화 정국에서 발 빠르게 공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