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디세우스 못지않은 장보고의 귀환

가리포진의 역사부터 서편제 촬영지까지, 섬이 품은 이야기들[이전기사 : 광복절에 찾은 목포, 거리 곳곳에 일제 수탈 흔적이]

완도에 도착해 짐을 정리한 뒤 완도타워를 찾았다. 언덕 위 전망대에 오르니 완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완도군에는 말도, 청산도, 장도, 여서도 등 많은 섬이 있다. 완도의 한자명은 완전할 완(完)자가 아니라 풀초(艹) 부수가 있는 완(莞)자를 쓰는데, 풀이 무성한 섬이라는 뜻이다.

완자를 빙그레웃음 완자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어, 완도에는 '빙그레'라는 상호를 가끔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완도의 여러 섬들은 강진·해남·영암·장흥 등 인근 고을에 나뉘어 속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완도에 설치된 가리포진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가리포진은 석성으로 둘레가 3리였으며, 중종 17년(1522) 왜구 방어를 위해 처음 설치되었다. 남해와 서해를 잇는 바닷길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완도타워에서 바라 본 완도 앞바다
ⓒ 여경수

저녁은 완도항의 전복 전문 식당에서 먹었다. 전복회, 전복장, 전복구이를 먹으니 피곤함이 사라졌다. 산책길에는 완도 출신 골프선수 최경주의 동상도 마주쳤다. 생존하는 운동선수의 동상을 보니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저녁 식사 후 친구들이 쉬는 동안 완도향교와 객사를 다녀왔다. 완도향교는 1896년 완도가 군으로 승격한 뒤 세워져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비교적 늦은 시기에 지어졌다. 1722년 지어진 완도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보관하던 공간이자 숙박시설로 쓰였다. 군현이 없던 완도에 가리포진 첨사가 객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완도가 오늘날 독립된 자치단체가 된 데는 이런 역사가 쌓여 있다.

다음날인 16일에는 완도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청산도로 향했다. 여름날의 청산도는 이름 그대로 짙푸르렀다. 주민 수는 한때 1만 3천 명이 넘었으나 지금은 2천 명 남짓이라고 한다. 50분 뒤 청산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택시를 대절해서 섬을 둘러보았다.

 서편제 촬영지인 청산도
ⓒ 여경수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나는 이청준 작가의 원작 소설 <서편제>를 읽었을 때의 감동과, 이후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동을 여전히 기억한다. 10대 후반, 세상을 향해 날 서 있던 시각이 이 작품을 통해 나름 순화되었던 느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봄날 황톳길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던 소리꾼 일가의 장면은 여전히 명장면으로 남아 있는데, 촬영지에 다가가니 스피커에서 그 노래가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택시 기사는 촬영 당시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을 직접 보았다고 들려주었다.

청산도에는 구들장논이라 불리는 다랑논과 돌담길이 남아 있다. 물을 모아두기 힘든 섬에서 논농사를 짓기 위해, 돌을 밑받침 삼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물을 가두는 방식으로 만든 농법이다.

범바위 앞에서 만난 사진작가에게 '청산8경'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물으니, 거문도 출신 유학자 김류(金瀏)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청산도, 여서도, 거문도에서 제자들을 길렀고, 청산도에는 그를 배향하는 숭모사가 있다. 뜻밖에도 이 작은 섬에서 묵향을 느낄 수 있었다.

청산도에서 점심으로는 톳이 들어간 비빔밥과 전복된장찌개를 먹었다. 톳무침, 미역줄기볶음, 김무침 같은 해조류 밑반찬들이 함께 나왔는데, 역시나 맛있었다. 검붉은 빛깔의 톳은 식감이 좋았다. 특히 군소무침은 처음 먹어본 맛인데, 스걱스걱 씹히는 맛이 참 좋았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완도(신라 청해진)
ⓒ 여경수

오후에 다시 완도로 돌아와 장보고기념관과 청해진이 있던 장도를 찾았다. 완도 장좌리 앞바다에 둥글넓적하게 떠 있는 장도는 장군섬이라고도 불리며, 목책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썰물 때면 갯벌이 드러나 걸어서도 건널 수 있다는데, 우리가 나올 무렵에는 이미 밀물이 들어차 있었다. 대동여지도에서 완도를 찾아보니 '신라청해진(新羅淸海鎭)'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역시 대동여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닌 문화를 담고 있는 지도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장보고에 관한 정보는 여러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장보고는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해 해상권을 장악했다. 장보고는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웠으나,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으려 하자 신하들이 "섬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대했고, 이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물론 반란이라는 용어는 삼국사기를 집필한 이들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청해진 사람들은 이후 벽골군(오늘날 김제)으로 옮겨졌다는 대목에서,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하는 디아스포라가 연상되었다.

 장보고기념관에서 바라 본 청해진
ⓒ 여경수

완도에는 15.5m 크기의 장보고 동상이 서 있다. 오른손엔 칼을, 왼손엔 교역물품도록을 쥔 모습으로, 무인이자 상인이었던 그의 삶을 보여준다. 장보고 사후 신라는 청해진을 폐허로 만들었는데, 이는 신라가 이미 쇠망해 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해양 상인의 후손인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으니, 바다를 장악하는 자가 권력을 쥔다는 것을 우리 역사가 보여주는 셈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오디세이>가 그려낸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떠올리면(10년), 페르시아·아라비아 상인까지 끌어들인 국제 무역망을 장악하고 9세기 불교문화 융성에도 기여한 장보고가 완도로 돌아온 것 역시, 귀향 서사의 백미로 읽힌다(장보고는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 금의환향 하기까지 약 20~25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냥 목록으로
원문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