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독한 더위가 물러가나 싶었다. 밤에도 선풍기를 켜지 않고 자는 날들이 많아졌다. 드디어 가을의 문지방을 넘을 수 있겠다 싶어 마음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절기를 이틀 앞둔 날은 습도가 높아도 너무 높았다. 마룻바닥이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고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은 얼굴에 척척 감기는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정말 가스 불조차 켜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 머리를 굴렸다.
'오, 그래. 오늘 점심은 새싹 비빔밥 너로 정했어.'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주부에게 가장 고민인 것은 바로 '오늘은 뭘 해 먹을까?'이다. 특히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엔 고민이 더 깊어진다. 퇴근 시간이 일정한 직업이라면 가끔 외식으로 끼니도 때우고 몸도 편하게 할 수 있다. 우리 집은 남편의 출퇴근이 들쭉날쭉해서 식당에서 밥을 먹기가 굉장히 어렵다. 우리가 외식하려고 하면 식당 문이 다 닫힐 시간이라, 결국 집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스 불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몸에도 좋고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월남쌈이었다.
지난 10일 월남쌈을 준비해서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고기 볶을 때만 가스를 켜면서도 입맛에도 딱 맞았다. 주로 채소 위주인 식단이라 밤늦게 끼니를 해결하는 우리 부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더 좋았던 건 한 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먹고 남은 재료로 두 끼를 더 먹을 수 있어서 식비도 줄이는 일거양득의 효과였다.
남편도 입맛에 맞았는지 한 번 더 월남쌈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19일에 다시 장을 봐서 월남쌈을 해 먹었다. 지난번에는 6가지 채소를 준비하였는데 이번에는 9가지 채소를 준비하였다. 빨간 파프리카, 초록 오이처럼 알록달록한 색을 맞추면 보기에도 좋고, 깻잎을 채 썰어 넣으면 향긋함이 돋보인다. 냉장고 귀퉁이에 있는 미역줄기도 소금물을 빼고 올리니 임금님 수랏상처럼 그득하게 차려졌다. 형형색색의 예쁜 채소와 소 불고기를 볶아 접시에 담아 놓으니 유명 식당 부럽지 않았다.
재료를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은 대략 3만 원 안팎이다. 식당에서 먹으려면 인당 1만 5천 원 정도는 내야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집에서 정성껏 재료를 준비해 딱 한 끼만 먹는다면, 차라리 외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세 끼를 해결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가성비는 없다. 4인 가족이 외식하려면 6만 원이 넘게 들 텐데, 단돈 3만 원으로 4인 가족의 한 끼로도 충분할 만큼 든든한 양이다.
첫 끼는 소불고기를 볶아 먹고 두 번째는 고기 대신에 메밀묵을 싸서 채소랑 먹었다. 고기가 없다면 두부도 좋고 오징어를 데쳐서 먹어도 궁합이 좋을 것 같다. 세 번째가 킥이었다.
드디어 20일 점심시간, 냉장고에 넣어둔 남은 새싹 채소와 오이 그리고 파프리카를 꺼냈다. 고기는 이미 다 먹었기 때문에 대용으로 쓸 만한 재료가 있나 싶어 다용도 수납장을 열었다. 라면과 간장 사이에 스팸 하나가 '까꿍'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 녀석을 데리고 나와 썬 다음 프라이팬에 볶았다. 큰 대접에 밥을 담고 갖가지 새싹 채소를 예쁘게 올리고 오이와 볶은 스팸도 올렸다. 화룡점정으로 잘게 썬 빨간색 파프리카를 올렸다. 달걀 프라이를 해서 가운데 놓고 초고추장을 두 바퀴, 참기름을 한 바퀴 둘렀다. 여기에 먹다 남은 월남쌈용 스위트 칠리소스를 살짝 섞었더니 감칠맛이 배가 되었다. 대접이 꽃으로 피어난 순간이었다.
|
| ▲ 월남쌈 단돈 3만 원으로 차린 월남쌈 밥상. 집에 있는 미역줄기도 같이 먹으니 맛이 기가 막힙니다 |
| ⓒ 황윤옥 |
멸치와 밴댕이 육수를 낸 다음 달걀 물을 풀어 국을 끓였다. 밑반찬 세 가지를 대접 옆에 놓고 현관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삐빅삐빅."
남편은 항상 집에 오면 식탁 위를 먼저 쳐다본다. '오늘은 뭘까?' 하고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나는 안 보고도 느낄 수 있다. 그 맛에 요리한다. 새싹 비빔밥을 보고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지는 남편의 모습을 헤헤거리며 쳐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스팸의 짭조름한 맛과 초장의 새콤달콤한 맛 그리고 여러 가지 채소의 신선한 맛이 어우러져서 환상적인 한 끼 밥상으로 태어났다. 너무 맛있어서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
| ▲ 새싹비빔밥 월남쌈을 해 먹고 난 뒤 남은 재료로 새싹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맛이 끝내줍니다 |
| ⓒ 황윤옥 |
단돈 3만 원으로 해 먹을 수 있는 월남쌈. 고기도 좋고 두부도 좋고 도토리묵도 좋다. 냉장고에 잠들어 있는 재료를 깨워 쌈 재료로 이용해도 더없이 훌륭하다. 남은 라이스페이퍼는 기름에 살짝 튀겨 김부각처럼 먹어도 좋다. 마지막에 먹는 새싹 비빔밥은 정말 신의 한 수라고 자부한다. 스팸 대신 고소한 참치 통조림을 살짝 얹어 비벼 먹어도 그만이다. 계절 상관없이 먹을 수 있지만, 불이 무서워지는 여름에 더 잘 어울리는 요리다.
오늘 저녁, 냉장고 속 잠자는 재료로 나만의 비빔밥 꽃을 피워보는 건 어떨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