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8월엔 '해방'을 주제로 써 봅니다.
그룹 멤버들과 8월엔 '나의 해방일지'를 쓰기로 했다. '딸깍' 해방을 탐색하는 문이 열리면, 응어리진 문장들이 시원하게 쏟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해방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해방에 실패한 이야기만 떠오르는 것이다.실패한 해방 이야기
결혼 전에는 내 삶을 움켜쥐려는 엄마의 눈초리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조금만 늦게 들어가도 도끼눈을 하는 엄마 때문에 자유롭게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거짓말을 했다. 예정보다 결혼을 빨리한 것도 엄마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한몫했다.
그런데 웬걸. 큰아이가 너무 빨리 생기는 바람에 다시 엄마의 도움이 절실했다. 결국 내 발로 엄마의 울타리 안으로 다시 기어 들어갔다. 엄마로부터 해방되기는커녕, 자식을 다 키우고 이제 막 자유를 누리려던 엄마의 삶에 내가 다시 훼방을 놓고 있었다. 엄마로부터의 해방은 처참한 실패였다.
돈으로부터도 해방되고 싶었다. 신혼 초부터 경제관념이 없던 남편 대신 내가 가계부를 움켜쥐었다. 알뜰하기는 했지만 돈을 불리는 재주는 나도 없었다. 몇십 년을 관리해도 재테크 수익률은 은행 이자를 따라가는 정도였다.
3년 전부터 남편이 재테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오십이라는 나이가 그를 불안하게 만든 모양이다. 옳다거니 싶어 경제권을 그에게 넘겼다. 돈을 불려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드디어 해방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 200만 원 안팎에 사놓은 SK하이닉스 주식의 잔고를 확인했다. 참을 수 없는 허탈감이 지하 140층으로 내리 꽂혔다. 돈에서 해방감을 찾는 건 나 같은 소인의 몫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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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29일 서울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 SK하이닉스 주가가 표시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2분기 매출 79조3천187억원, 영업이익 60조5천426억원을 기록했다고 이날 공시했다. 2026.7.29 |
| ⓒ 연합뉴스 |
너무 답답했다. <나의 해방일지> 기획안 제출일은 다가오는데, 결국 나는 어느 것에서도 해방되지 못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에게 내가 무엇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보이는지 물었다.
"너는 내가 아는 고3 엄마 중에 가장 자유로워."
고3 엄마로부터의 해방이라!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랬다. 나는 고3 엄마였다. 그것도 꽤 태평한. 지난 8월 11일이 수능 100일 전이었다는 것도 지인이 보내준 선물을 받고서야 알았다. 작년에 조카를 서울대에 보낸 여동생이 내게 말했다.
"언니는 애 입시는 뒷전이고, 너무 자기 인생(글쓰기)에만 빠져 있는 것 같아."
반박하지 못했다. 내 휴대전화로 오는 문자의 절반은 딸의 학원비와 교재비 청구서이고, 마트 장바구니의 절반은 딸이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돈과 물질로 조용히 밀당하면서, 정작 마음은 딸의 입시에서 살짝 빼고 있었으니, 이런 것도 해방이라고 할 수 있나?
"엄마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말에 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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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봐도 모르겠는 복잡한 대입 전형 AI 생성이미지 |
| ⓒ 이인자 |
7월 말, 여름방학을 앞두고 딸에게서 카톡이 왔다. 담임 선생님과 수시 상담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희망 대학 아홉 곳을 알려줄 테니, 전형 방법과 경쟁률, 입시 결과를 정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바빴던 탓도 있었겠지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험생인 딸이 직접 대입요강을 찾아봐야 공부할 동기도, 오기도 생기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주 7일 내내 수능 학원과 미술 학원을 오가며 지쳐 돌아오는 딸의 얼굴을 외면할 수 없었다.결국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들여다본 대학 입시 전형은 생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급하게 정리한 파일을 보내며 나머지는 스스로 정리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 파일로는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딸은 울분을 터트렸다. 엄마는 어렸을 때는 자신의 공부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으면서, 정작 자신이 필요할 때는 관심이 적어진 것 같아 섭섭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딸의 말이 맞았다.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딸의 시험 기간은 곧 나의 시험 기간이었고, 딸의 성적표는 내 행복의 척도였다. 딸의 미래를 내 손으로 완벽하게 통제하려 들었던 극성맞은 진로 매니저가 바로 나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딸의 성적에 일희일비하는 내가 한없이 나약해 보였다. 딸의 성적이 엄마인 나의 행복까지 결정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마침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고, 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딸의 고민도 절정, 나의 글쓰기 고민도 절정인 시기가 겹친 것이다.
딸은 어느 날, 유치한 질문도 했다.
"엄마는 엄마 글이 더 잘 되었으면 좋겠어? 내가 원하는 대학에 붙었으면 좋겠어?"
예전 같았으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당연히 네가 원하는 대학에 붙는 게 좋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길어졌다. 딸의 대학 합격만큼이나 내가 꿈을 찾아가는 이 여정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학에 붙는다고 딸의 인생이 순탄대로를 향해 가는 것은 아니니까.
사춘기 무렵부터 딸은 엄마인 나를 이기고 싶어 했다. 말싸움도 지지 않았다. 딸의 말로는 우리는 둘 다 공격수 스타일인데, 자신이 엄마보다 공격을 더 잘한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논리를 펴다 딸의 당찬 팩트 폭격에 말문이 막히는 건 언제나 나였다. 그러니, 엄마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에 기가 막혔는데, 지금은 곱씹을수록 안심이 된다. '엄마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딸의 말이, 딸이 엄마인 나를 누르고 나를 넘어 나보다 더 멋지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으로 바뀐 것이다. 비록 나는 엄마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지만, 딸은 나에게서 해방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해방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이쯤에서 나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고3 엄마에서 해방되었을까. 아마도 실패로 끝날 것이다. 곧 수시 원서 접수(2026년 9월 7일~11일)가 시작되면 진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입시요강을 뒤적일 것이다.
딸이 학원에서 끝날 때쯤이면 딸이 좋아하는 치즈가 잔뜩 뿌려진 뿌링클 치킨을 시켜놓고, 딸의 기분을 살필 것이다. 그게 어디 대입뿐이랴. 팔십이 된 부모가 오십이 넘은 딸의 손을 여전히 놓지 못하는 것처럼, 자식을 품은 부모에게 완벽한 해방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엄마로부터도, 돈으로부터도, 그리고 딸의 대입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벼운 건, 해방이란 무언가를 팽개치고 완전히 도망치는 게 아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야 이해하지만, 사랑은 결국 우리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다만, 사랑하는 이의 삶을 내 욕망으로 침범하지 않는 것. 그저 묵묵히 울타리가 되어주되 그 안을 성급히 통제하려 들지 않는 것. 기꺼이 짐을 나눠지면서도 그것을 내 삶의 훼방이라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을 깨우쳐가는 지금이야말로, 실패한 줄 알았던 해방의 문이 다시 '딸깍' 열리는 순간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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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들지? 딸 네가 좋아하는 치킨이야 |
| ⓒ 이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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