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주도권 놓고 대규모 자금전
전문가 "투자 방향 적절…패키징, 다음 승부처"
"호황기 벌어들인 돈으로 체질 바꿔야"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인공지능(AI) 반도체 주도권을 놓고 사상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비를 쏟아붓고 있다. 삼성전자는 압도적 자금력으로 '체급 우위'를 과시했고,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년치에 맞먹는 자금을 불과 반년 만에 투입하며 '속도전'에 나섰다.
연합뉴스반기 기준 역대 최대 R&D…삼성이 3배 앞서
2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양사의 반기보고서를 보면, 올해 상반기 R&D 비용은 삼성전자 27조 3627억원, SK하이닉스 6조원으로 각각 집계됐다. 두 회사 모두 반기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의 R&D 비용을 따로 공개하지 않는다. 다만 전사 매출 대비 R&D 비율(9.0%)을 적용해 추산하면, DS 부문에만 약 20조 1000억원이 투입된 것으로 파악된다. SK하이닉스(6조원)의 3.3배 수준으로,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고 있다는 평가다.
SK하이닉스의 투입 속도도 이례적이다. 상반기에 집행한 6조원은 지난해 연간 전체 R&D 지출액(6조 7000억원)에 육박한다. 불과 반년 만에 1년치를 투입할 만큼 치열하게 기술 격차 수성에 나선 셈이다.
개발한 기술을 실제 제품으로 생산해 내는 양산화 능력 지표인 시설투자(CAPEX)에서도 체급 차이가 드러났다. 올해 상반기 기준 시설투자액은 삼성전자 DS 부문이 25조 6000억원, SK하이닉스가 17조 6000억원을 기록했다.
기술 개발비를 장부에 반영하는 방식에서도 온도차가 있다. 삼성전자는 상반기 R&D 비용 27조 3627억원 전액을 '비용'으로 처리했다. 비용으로 처리하면 그만큼 올해 이익은 줄어든다. 기술 개발 성공 가능성이 있더라도 장부상 자산이나 이익을 부풀리지 않는 보수적인 방식을 택한 셈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R&D 비용 6조원 중 5조 8000억원만 비용으로 처리하고, 나머지 2000억원은 '무형자산'으로 분류했다. 개발비를 자산으로 잡으려면 기술 완성 가능성과 향후 수익 창출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그만큼 SK하이닉스가 해당 기술의 상용화 가능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삼성 고른 성과 vs 하이닉스 '메모리 고성능화' 집중
막대한 투자는 실제 성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고대역폭메모리(HBM)4'를 양산해 출하했다. 10나노급 최신 D램과 4나노 공정 기반 부품을 적용해 업계 최고 성능을 구현했다는 평가다. 여기에 데이터를 더 빠르게 주고받는 차세대 HBM인 'HBM4E 12단' 샘플까지 출하를 마쳤다.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온디바이스 AI용 저장장치(UFS 5.0), 서버용 초고속 저장장치(PM1763)는 물론 자체 개발한 모바일 시스템반도체 '엑시노스' 시리즈까지 여러 영역에서 고르게 성과를 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고성능화'에 힘을 집중했다. 데이터센터용 초고속 저장장치와 321단 낸드플래시 기반 저장장치 개발을 마쳤다. D램 분야에서도 2027년 출시될 스마트폰을 겨냥해 기존보다 빠른 속도(초당 10.7기가비트)를 내는 차세대 모바일 D램과 서버용 D램 개발을 완료하며 프리미엄 메모리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했다.
전문가 "기술 방향은 긍정적…다음 승부처에 자금 쏟아야"
전문가들은 차세대 반도체 공정 전환이 본격화된 만큼, 양사의 사상 최대 R&D 투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HBM4E 이후부터는 구리와 구리를 직접 연결해 열효율과 부피를 극적으로 개선하는 차세대 패키징 방식인 '다이렉트 본딩'과 2나노급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이 핵심 승부처가 될 것"이라면서 "이런 분야의 연구개발비 확대는 긍정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 사업을 함께 운영하며 축적한 미세공정 노하우가 메모리 신기술 개발 등에도 시너지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삼성전자의 R&D 투자는 액수를 넘어 기술 방향성 측면에서도 상당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SK하이닉스에 대해서는 "TSMC 등 글로벌 파운드리 생태계와의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다이렉트 본딩 등 첨단 기술 확보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이번 반도체 호황기(슈퍼사이클)에 벌어들인 수익을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경쟁력 확보에 투입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레거시 공정에서는 중국의 캐파 증설을 의식한 생산능력 확대가, HBM 등 첨단 영역에서는 기술 격차를 벌리는 데 초점을 맞춘 연구개발이 각각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이어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5년 안팎에 끝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지금이 시스템 반도체 설계 경쟁력과 온디바이스 AI 반도체, 이를 구동하는 소프트웨어 역량까지 확보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