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연합뉴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반도체에 고율 관세를 부과해 해외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이전하도록 압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실상 한국·대만 등 아시아 반도체 기업들을 겨냥한 조치다. 하지만 미국 빅테크 업계에서는 고율 관세가 반도체 가격을 끌어올려 오히려 미국의 인공지능(AI)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폴리티코가 인용한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반도체뿐 아니라 노트북, 게임 콘솔, 데이터센터 서버 등 반도체가 들어가는 여러 완제품까지 반도체 관세 부과 대상을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상무부는 해외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압박하려면 관세를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정확한 관세율을 확정하지 않았지만 국가별 관세율과 쿼터 설정, 주요 반도체 제조사별 지침 적용 여부도 아이디어로 거론되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특히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일정 물량까지는 무관세 수입을 허용하되, 그 이상에 대해서는 해외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내 투자와 생산을 얼마나 약속하느냐에 따라 무관세 물량을 추가로 배정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정부가 검토하는 미국 내 투자 연계 관세는 올 1월 미국이 대만과 체결한 무역협정과 유사하다. 이 협정은 대만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0%에서 15%로 낮추는 한편, TSMC 등 대만 반도체 기업이 미국에 새로 짓는 공장의 생산 능력에 비례해 일정 물량의 반도체를 무관세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11월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대우하겠다는 최혜국 대우 약속을 받았지만 서면 합의로 명문화되지는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간 여러 차례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 이전을 압박하며 다양한 관세 부과 계획을 밝혀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반도체에 100% 관세를 매기겠다. 다만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다면 관세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 테일러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이며,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에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생산하는 첨단 패키징 시설 착공에 들어갔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계속 추가 투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트닉 상무장관은 지난달 9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반도체 팹을) 건설하게 하고 싶다”고 한국 기업을 콕 찍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미 빅테크 업계에선 AI 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과 반도체 관세 정책이 충돌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반도체 고율 관세는 AI 개발에 필수적인 반도체 가격을 끌어올리고, 미국 내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을 크게 높이게 될 것이란 지적이다 .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수자이 시바쿠마르 연구원은 “높은 관세는 숙련된 기술자를 만들어 내지도, (반도체 생산) 인프라를 확충해주지도 못한다”며 “미국 반도체 제조업을 활성화하려면 단순히 수입품을 비싸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해당 업계 관계자는 “미국 내 반도체 제조 기반을 구축하는 데 5년 이상이 걸릴 것이고, 그 사이 관세 부담은 기업들이 떠안게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계산이 맞지 않는다. 정부가 무관세로 허용하겠다고 하는 물량은 수요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폴리티코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