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워시 미국 연준 의장 [AP/뉴시스]케빈 워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취임 후 첫 잭슨홀 연설에서 인플레이션에 강경한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다음 달 기준금리 결정을 둘러싼 그의 딜레마도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물가 압력이 이어지는데도 금리를 동결하면 연준의 물가 안정 의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금리를 올리면 금리 인하를 압박해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면충돌할 가능성이 커진다.● 금리 인상 가능성 열어둔 워시…시장은 즉각 반응
워시 의장은 28일(현지 시간)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연례 경제정책 심포지엄에서 “기저 인플레이션이 우리의 목표를 향해 명확하고 충분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밝혔다. 물가 상승률이 연준 목표인 2%를 향해 충분히 빠르게 내려가지 않을 경우 금리 인상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노동시장이 안정되고 미국 경제도 견조한 만큼 연준의 우선순위를 물가 안정에 둬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를 워시가 취임 후 금리 인상 필요성을 인정하는 데 가장 가까이 다가간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다음 달 15, 1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가 오를 가능성은 연설 전 약 40%에서 연설 뒤 약 60%로 뛰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인용한 CME그룹 자료로도 9월 인상 가능성이 전날 35%에서 58%로 상승했다. 금리 전망에 민감한 미 국채 2년물 금리는 0.118%포인트 오른 4.348%로 마감했다.
다만 워시 의장은 9월 금리 인상을 예고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자신의 연설을 향후 금리 경로를 미리 약속하는 ‘포워드 가이던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다음 달 11일 발표되는 소비자물가지수(CPI) 등 향후 지표가 금리 결정의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CPI가 뚜렷한 물가 둔화를 보여주면 동결할 명분이 생기지만, 물가 압력이 계속되면 인상을 미루기 어려워질 수 있다.
● 올려도, 안 올려도 부담
[AP/뉴시스]더 큰 문제는 정치적 부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워시를 연준 의장으로 낙점한 뒤에도 공개적으로 금리 인하를 요구해왔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가계와 기업의 차입 비용을 높이는 금리 인상이 이뤄지면 백악관과 연준의 갈등이 전면화할 수 있다.뉴욕타임스(NYT)는 29일 워시 의장이 어느 쪽을 택해도 정치·경제적 부담을 피하기 어려운 ‘노 윈(no-win)’ 상황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낸 모리스 옵스펠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NYT에 “그에게는 여러 개의 과녁이 있다”며 “노 윈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최근 장기 국채 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장기채 바이백 확대 등에 나선 것도 워시 의장의 고민을 키우고 있다. 연준이 금리를 올리면 차입 비용을 낮추려는 재무부와 물가를 잡기 위해 금융 여건을 조이려는 연준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된다. WSJ는 이를 재무부와 연준 간 새로운 ‘힘겨루기(tug-of-war)’라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정치적 충돌을 의식해 필요한 금리 인상을 미룰 경우에는 연준의 독립성이 훼손됐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오스탄 굴스비 시카고 연은 총재는 NYT에 “중앙은행의 시간표는 시장의 시간표도, 선거의 시간표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반면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가능하다면 중간선거 이후까지 인상을 미루는 것이 연준이라는 기관에는 나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워시 의장은 금리를 올리면 자신을 지명한 트럼프 대통령과 충돌하고, 올리지 않으면 연준의 물가 안정 의지와 독립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