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연안을 유조선 한 척이 항해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트럼프는 28일(현지시간) 자신의 SNS 트루스 소셜 계정에 올린 글에서 “미국은 방금 베네수엘라와 합의에 도달했으며,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원유 관련 계약”이라며 이처럼 밝혔다. 그는 “나의 지시에 따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전쟁부) 장관이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과 긴밀히 협의해 왔으며, 민간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미국인의 세금을 전혀 쓰지 않고 650억 배럴 이상의 확인 석유 매장량에 대한 과반 통제권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어 “이 역사적인 거래를 통해 미국이 통제하는 확인 원유 매장량은 두 배 이상 늘어나게 될 것이며, 우리 원유 공급량도 증가할 것이며, 향후 오랜 기간 동안 모든 미국인의 휘발유 가격을 상당히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로드리게스도 이날 성명을 발표하고 이번 합의로 17개 전략 유전을 개발해 생산량을 크게 늘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베네수엘라는 이를 통해 총 2090억달러에 이르는 세수를 확보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로이터가 입수한 유전 목록에는 오리노코 벨트의 미개발 유전과 마라카이보호 일대의 기존 유전이 포함됐으며, 일부는 지난 1월 축출된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당시 계약을 맺은 중국계 업체가 운영 중이라고 한다.
루비오는 자신의 엑스(옛 트위터) 계정에 올린 글에서 “이번 합의를 통해 베네수엘라에는 1000억달러 규모의 민간 투자가 이뤄질 것이며, 수천 개의 고소득 일자리를 창출하고, 베네수엘라 경제 재건에 동력을 불어넣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 당국자를 인용해 “로드리게스는 미국 정부와 베네수엘라 민간 운영사의 합작 프로젝트를 위해 설립되는 민간 기업에 100년간의 유전 임차권을 허가했다”고 보도했다. AP통신도 익명의 당국자를 인용해 미국 정부는 신설 기업의 지분 및 원유를 원가에 매입할 권리를 합쳐 전체 생산분의 55%에 대한 실질적 권리를 보유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지분과 원가 매입권이 각각 몇%를 차지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이 해당 기업에서 원가에 매입한 원유는 전략비축유(SPR)를 채우고 군용으로도 활용될 예정이라고 이 당국자는 덧붙였다.
사업이 현실화한다면 해당 기업은 사우디 아라비아 아람코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확인 매장량 보유 기업이 될 전망이다. WSJ는 미 정부가 외국 원유 생산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가 국영 기업을 만들어 해외 매장량을 확보하고, 사우디 내에 조차권을 갖는 미국 기업 인수를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규모인 약 3000억 배럴의 확인 매장량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매장량은 약 460억 배럴 수준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 AFP=연합뉴스 트럼프가 밝힌 대로라면 이번 합의로 이란과 러시아 등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던 원유 공급망의 규칙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서반구 중심의 원유 공급망을 구축해 지정학적 요인에 따른 공급 불안에 대한 노출을 줄이고, 트럼프가 강조해온 ‘돈로주의’를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구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돈로주의는 서반구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역외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트럼프식 먼로주의를 뜻한다.
로드리게스도 “이번 투자는 우리의 산업 현대화와 회복뿐 아니라 경제 성장과 서반구의 에너지 안보, 국제 시장의 안정성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루비오 역시 “이는 우리 서반구에서 안정적인 원유 매장량을 확보하고, 미국의 휘발유값을 낮추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펼치고 있는 대담한 미국 우선주의 외교 정책의 성과”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이란전 여파로 휘발유값이 크게 오르며 악화한 미국 여론을 다독이고, 시장 심리를 진정시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상당한 휘발유가 인하”를 강조한 이유다.
미국의 휘발유 가격은 이날 기준 갤런당 평균 4.09달러로, 1년 전 3.21달러보다 크게 올랐다. SPR도 올 들어 1억 배럴 이상 줄어 3억 배럴 아래로 내려갔다.
다만 아직 양국 간 합의의 구체적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미 언론은 베네수엘라의 법·제도 등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베네수엘라는 1970년대 원유 사업을 국영화했다.
로이터는 전문가를 인용해 “국가가 핵심 석유 산업 활동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는 베네수엘라에서 이런 방식은 법적·헌법적 난관에 부딪칠 수 있다. 미국 정부의 유전 임대가 법적 근거를 갖췄는지 불명확하며, 취약한 전력망이나 제한된 수출 역량 등으로 인해 이런 방식이 실질적 규모의 투자를 촉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전했다.
또 “점도·밀도·유황 함량이 높은 베네수엘라산 중질유(heavy crude)를 생산·수송·정제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는 수년이 걸릴 수 있다”며 “이번 합의가 단기적으로 휘발유 가격을 낮출 수 있을지 여부도 여전히 불확실하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마두로 대통령 축출 뒤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에 대한 미국 기업의 투자를 장려해 왔다. 하지만 상당수 기업은 정치적 불안정성 등을 이유로 이를 주저해왔다. 이번 조치로 기업들의 의구심이 해소될지도 두고 볼 문제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