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인력 투입 지연땐 초기 수율 차질
해외 경쟁사에 주도권 내줄 위험 커
국가전략 산업 투자 시기 놓칠 수도
전문가 “사업확장형 배치전환 경우
쟁의대상서 명백히 제외 명시해야”
6월23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인근에서 삼성전자 노조가 영업이익 15%를 성과급으로 요구하며 대규모 결의대회를 갖고 있다. 서울경제DB재계가 노동조합법 새 시행 지침 내 쟁의 예외 규정 명시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배경에는 신규 투자와 필수 인력 배치가 노조의 파업 대상이 될 경우 국가전략산업 투자가 통째로 마비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 중인 800조 원 규모의 호남 반도체 팹(Fab) 프로젝트가 노조 벽에 가로막히면 글로벌 첨단산업 패권 경쟁에서 한국만 골든타임을 놓친 채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30일 재계에 따르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최근 ‘노동 현안에 대한 경영계 제언’을 통해 “호남 반도체 공장 신설과 인력 배치는 단체교섭 대상이 아니다”라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경총은 “개정 노조법으로 노동쟁의 범위가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 경영상 결정’으로 확대되면서 기업 경영에 관한 노조의 관여 시도가 늘고 있다”며 “반도체처럼 신속한 의사 결정이 생명인 국가전략산업에서 투자 시기를 놓치거나 해외투자로 대체되는 등 심각한 국가 경쟁력 손실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은 내년 7월 착공해 2029년 완공을 목표로 호남 반도체 공장 신설을 추진 중이다. 첨단 반도체 팹이 정상 가동하려면 수도권 기존 공장에서 수년간 경험을 쌓은 숙련 엔지니어를 투입해 초기 수율(생산품 대비 양품 비율)을 안정시키는 과정이 필수다. 첨단 미세 공정에서는 가동 초기 수율을 얼마나 신속히 끌어올리느냐가 수백조 원 투자의 성패를 가른다. 그러나 삼성전자 최대 노조인 초기업 노조가 개정 노조법을 근거로 호남 프로젝트 관련 사안을 2027년 교섭 의제로 다루겠다고 선언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800조 원을 들여 공장을 짓더라도 핵심 인력 전환 배치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면 정상 가동이 무기한 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전력과 용수를 공급해도 가장 중요한 ‘숙련 인력’을 제때 투입하지 못하면 공장은 거대한 껍데기에 그칠 수 있다”며 “글로벌 경쟁사에 시장 주도권을 내줄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올 3월 법 개정 전까지만 해도 기업의 설비투자와 이에 따른 인력 배치는 쟁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법원 역시 공장 신설 등은 경영 주체의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해당해 원칙적으로 단체교섭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하지만 개정 노조법이 경영상 결정을 쟁의 대상에 포함하면서 경계가 무너졌고 해석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졌다.주요 선진국들은 경영권과 파업권의 경계를 비교적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영국은 법률상 보호받는 노동쟁의 대상을 임금 등 고용 조건과 채용·해고, 업무 배분과 징계 등으로 한정한다. 신규 투자와 같은 경영 판단을 이유로 한 파업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미국 역시 1981년 연방대법원이 사업부 철수 등 경영 판단은 회사의 고유 권한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임금과 근로시간은 반드시 협상해야 하는 ‘의무적 교섭 사항’으로 보지만 공장 신설이나 신규 투자는 경영권의 영역으로 둔 것이다.
독일과 일본도 설비투자를 경영 전권 사항으로 인정하고 있다. 투자에 수반되는 근무지 변경이나 주거 지원 등 근로자의 생활상 불이익을 보전하는 문제만 협의할 뿐 투자 결정 자체를 쟁의 대상으로 삼아 파업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가 마련 중인 새 시행 지침에 쟁의 대상의 예외 기준을 명확히 명시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력 감축을 전제로 한 ‘구조조정형 배치 전환’과 신사업 확장을 위한 ‘신규 투자형 배치 전환’은 법리적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며 “투자 실행과 필수 인력 배치는 경영권의 영역으로 보장하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이익 보완을 협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짚었다. 이어 “새 시행 지침에 신규 투자와 공장 신설에 따른 사업 확장형 배치 전환은 노동쟁의 대상에서 명백히 제외된다는 점을 명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