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타워. [사진=롯데]롯데그룹이 최근 AI 물류, 글로벌 사업 확대, 자산 효율화 등 ‘미래 성장’과 ‘체질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선 여전히 롯데에 대한 우려이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삼성, SK, LG, 현대차 등이 AI 혁신 기업으로 치열한 전환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시장 참여자들은 롯데에게선 그러한 대규모 변화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롯데의 주요 계열사 반기보고서를 살펴보면 대규모 투자와 자산 매각, 차입 부담, 적자 사업 등이 동시에 나타난다. 전년과 대비해 두드러진 성과는 아직 없다. 롯데가 현재 무엇을 줄이고 어디에 돈을 넣고 있는지, 그 선택이 실제 실적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주요 계열사별로 짚어본다. <편집자 주>
[디지털데일리 김남규기자] 시간을 4년전으로 거슬러 가본다. 당시 롯데는 그룹 전체의 유동성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AI혁신 경쟁에서 롯데가 경쟁사들과 비교해 뒤쳐지는 원인중 하나가 됐을 수 있다.
2022년 10월, 당시 레고랜드 사태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의 돈줄이 마르자 롯데건설이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롯데건설의 PF 우발채무는 6조8000억원에 육박했다.
만기가 돌아온 PF 유동화증권의 차환이 막히면서 롯데건설은 계열사와 금융권에서 급전을 끌어와야 했다. 건설사 한 곳의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해 그룹 전체의 현금과 신용을 동원해야 했다. 자산 121조원, 재계 5위 롯데의 ‘허약한 체질’이 시장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시작은 롯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2050억원짜리 채권이었다. 2022년 9월 강원도가 지급보증한 춘천 레고랜드 개발사업의 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상환되지 않으면서 채권시장이 얼어붙었다.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채권마저 제때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이 번지자 투자자들은 건설사 PF 유동화증권부터 외면했다.
롯데건설이 레고랜드 사업에 보증을 선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PF 시장이 얼어붙을 당시 이미 대규모 우발채무를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부동산 호황기에 PF 사업을 빠르게 늘린 롯데건설은 자금시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만기가 돌아온 유동화증권을 새 증권으로 갈아타며 자금을 굴렸다. 레고랜드 사태는 이 차환 구조를 한순간에 흔들어놨다.
춘천 레고랜드 [사진=연합뉴스]◆호황기에 키운 PF 6.8조원…돈줄 막히자 ‘부메랑’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2022년 하반기 롯데건설의 PF 우발채무는 약 6조8000억원에 달했다. 연대보증과 채무인수, 자금보충 등 시행사의 PF 조달 과정에서 롯데건설이 신용을 제공한 금액이다. 규모가 큰 데다 착공·분양 이전 단계 사업장 비중도 높아 PF 시장 경색에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6조8000억원이 당장 롯데건설이 갚아야 할 빚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차환이 이뤄지면 건설사가 직접 자금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레고랜드 사태 이후 새 유동화증권을 사줄 투자자가 사라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롯데건설은 2022년 4분기 만기가 돌아온 PF 유동화증권 가운데 2조9000억원을 자체 매입했다. 차환되지 않은 물량을 직접 떠안으면서 우발채무가 실제 유동성 부담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재무구조는 순식간에 나빠졌다. 연결 기준 순차입금은 2021년 말 5430억원에서 2022년 말 3조3619억원으로 6배 넘게 불어났다. 부채비율도 같은 기간 109.8%에서 264.8%로 치솟았다.
롯데건설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그룹 계열사들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롯데케미칼이 5000억원, 롯데정밀화학이 3000억원, 롯데홈쇼핑이 1000억원을 빌려줬다. 유상증자까지 더해 2022년 말까지 계열사에서 수혈받은 자금은 1조원을 넘어섰다. 시중은행 대출까지 합하면 당시 롯데건설이 확보한 유동성은 약 2조5000억원에 달했다.
화학과 유통, 호텔 등 그룹 곳곳의 현금과 신용이 건설사 한 곳으로 향했다. 롯데건설의 PF 문제가 그룹 전체의 재무 부담으로 번진 지점이다.
계열사 지원만으로도 부족했다. 롯데건설은 이듬해 1월 메리츠금융그룹과 1조5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롯데물산·호텔롯데·롯데정밀화학 등 계열사가 6000억원의 후순위 자금을 책임지고 메리츠금융 계열사가 9000억원의 선순위 자금을 대는 구조였다. 조달금리는 연 12%에 달했고 만기는 1년 2개월에 불과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건설 살리려 그룹 총동원…‘현금부자 롯데’ 약한 고리 드러나
대규모 자금 수혈로 롯데건설은 급한 불을 껐다. PF 시장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으면서 자체 매입했던 유동화증권을 줄이고 순차입금도 낮췄다. 이후 PF 우발채무 축소에도 속도를 냈다. 2022년 6조8000억원이던 PF 우발채무는 2023년 5조4000억원, 2024년 3조7000억원, 지난해 3조2000억원 수준까지 감소했다.
하지만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롯데그룹의 약한 고리가 드러났다. 특히 롯데건설에 5000억원을 긴급 지원한 롯데케미칼은 당시 일진머티리얼즈 인수 등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동시에 중국발 공급과잉에 따른 석유화학 업황 악화를 맞고 있었다. 그룹의 핵심 현금창출원이 자체 투자와 건설사 지원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따라서 현재 롯데의 부진을 2022년 롯데건설 PF 위기의 단순한 연장선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롯데건설의 PF 부담 자체는 당시보다 크게 줄었다. 레고랜드 사태가 롯데그룹의 위기를 만들어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당시 사태가 던진 경고는 분명했다. 2050억원짜리 채권에서 시작된 자금시장 경색이 롯데건설의 6조8000억원 PF 부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이를 막기 위해 재계 5위 그룹의 현금과 신용을 총동원해야 했다.
건설의 급한 불을 끈 뒤에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롯데건설을 떠받쳤던 롯데케미칼은 석유화학 장기 불황에 빠졌고, 그룹의 또 다른 축인 유통도 성장동력이 약해졌다. 반면 바이오와 배터리 소재 등 신사업에는 계속 돈을 넣어야 했다.
레고랜드 사태는 ‘현금부자 롯데’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던 그룹의 허약한 체질을 시장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건설에서 처음 켜진 경고등은 이후 화학과 유통으로 옮겨붙었다. 롯데가 4년째 체질 개선에 매달리고 있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