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 협상 진행 중이더라도 메시지 관리에 신중할 필요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 개회사지난달 31일 오후 일본 미야기현을 방문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발언을 두고 국내외 언론들은 적잖은 소동을 벌였습니다. 블룸버그가 최 회장의 현장 발언을 인용해 ‘SK하이닉스가 일본에서 메모리 반도체 합작공장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타전했기 때문입니다. 최 회장이 “일본 전역을 살펴보고 있다” “전력과 용수가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 가능하다”고 언급했다는 소식까지 더해지며 SK하이닉스의 일본 공장 착공 발표가 임박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확산했습니다.
파장이 커지자 SK그룹은 “조건이 맞는 곳이라면 어디든 열려 있다는 원론적 취지일 뿐 합작공장 신설 확정은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번 발언을 단순한 ‘원론적 립서비스’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 재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실제로 미야기현 측과 반도체 팹 설립을 두고 전력·용수 등 필수 인프라 조건과 파격적인 정부 보조금 규모까지 포함해 상당한 수준의 실무 논의를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투자가 언제든 현실화할 수 있는 카드라는 의미입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국내 프로젝트를 대하는 태도와의 뚜렷한 대비입니다. 지난 6월 말 정부가 ‘3대 메가프로젝트’를 통해 호남 메모리 팹 구상을 내놓았을 당시, SK와 최 회장은 발언을 극도로 아꼈습니다. 거대한 팹을 가동하는 데 필수적인 송전망과 용수 등 핵심 인프라 구축의 현실성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섣부른 약속을 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전력과 용수가 확실히 보장되고 파격적인 보조금 패키지가 약속된 일본에서는 구체적인 논의를 진척시키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해외 팹 투자가 현실적인 선택지로 부상할수록 메시지 관리의 무게감은 배로 무거워집니다. 물밑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총수의 ‘열린 발언’이 해외 언론을 통해 ‘투자 기정사실화’로 확산될 경우, 향후 협상 지형에서 스스로 패를 먼저 노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최종 조건 조율 과정에서 기대치가 꺾였을 때 직면할 현지의 외교·통상적 역풍이 만만찮을 것입니다. 국내 여론과 우리 정부와의 조율이라는 미묘한 문제도 있습니다.
철저한 실리 계산에 기반한 글로벌 확장 전략은 기업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다만 그 실행 과정에서의 입지 메시지만큼은 철저한 보안과 정교한 계산 아래 절제되고 일관되게 관리돼야 합니다. 글로벌 격변기, 반도체 총수의 한마디는 곧 국가급 전략 자산의 무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