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재배치엔 노조와 교섭 여지 남겨
800조 규모 호남 반도체 팹 지연 우려
재계 “시행령 명문화로 리스크 없애야”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가 지난 달 23일 경기 평택시 평택캠퍼스 앞에서 영업이익의 15%의 성과급 지급 명문화를 요구하며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서울경제DB고용노동부가 공장 신설 등 고도의 경영상 결정을 노동쟁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새 노동조합법 지침을 내놨지만, 정작 투자를 실행하기 위한 핵심 절차인 ‘인력 재배치’는 노조와의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논란이 일고 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되는 대규모 신규 투자가 인력 운영 문제로 노사 갈등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3일 재계에 따르면 고용부가 최근 발표한 ‘노동쟁의 대상 관련 시행지침’을 두고 산업 현장에서는 “핵심 쟁점은 해소하지 못한 반쪽짜리 지침”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침은 기업의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 요구나 공장 신설 결정 자체는 의무적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명확히 했다. 하지만 신규 공장 가동을 위한 인력 운영 계획이 구체화될 경우 이에 따른 배치전환은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경영 판단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실제 실행 단계에서는 합법적 쟁의 가능성이 남은 셈이다.
문제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 투자의 경우 ‘투자 결정’과 ‘인력 재배치’가 사실상 분리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규모 반도체 프로젝트가 본격 추진될 경우 최첨단 생산라인 가동을 위해 기존 사업장의 숙련 엔지니어를 투입하고 신규 인력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학계에서도 “인력 재배치는 투자의 부수 절차가 아니라 투자 실행 과정의 핵심”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새 지침을 둘러싼 우려는 여기서 나온다. 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더라도 공장 가동을 위한 인력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노조와의 갈등 가능성을 떠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삼성전자(005930) 최대 노조인 초기업노조는 조합원 다수의 반대 의견을 이유로 호남 반도체 프로젝트를 2027년 교섭 의제로 다루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기업이 전략적 투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사 협의가 사실상 추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경제계와 법조계에서는 신규 투자에 따른 인력 이동을 기존 인력 감축을 의미하는 ‘구조조정’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법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공장 신설과 같은 고도의 경영상 결정은 노사 갈등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며 “숙련 인력의 신속하고 유연한 투입 없이는 첨단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정권이나 부처 해석에 따라 변경될 수 있는 행정지침만으로는 현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미 근로기준법에 따라 법원이 전직 처분의 정당성을 사후적으로 판단하는 상황에서 단체교섭과 쟁의 절차까지 적용될 경우 기업의 경영 판단 위축과 노사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회와 정부가 보완 입법을 통해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노조법에 명확한 근거를 마련해 ‘신규 투자에 따른 배치전환은 노동쟁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과 일본은 대규모 보조금을 앞세워 생산시설 확보 경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자본과 기술뿐 아니라 적기에 인력을 투입하는 역량도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이라며 “불확실한 노동 규제가 국가 전략 프로젝트의 추진력을 떨어뜨리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