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천연가스 재고율 65%로
5년 평균 82%에 크게 뒤처져
유럽·동아시아 동시 한파땐
LNG 확보경쟁 더 치열할 듯
원유·정제유 공급도 불안해
美 경유가격 사상 최고 기록
구매시점·공급 다변화 필요
올겨울 세계 각국이 에너지 확보 경쟁에 내몰린 배경에는 전쟁과 지정학적 갈등으로 흔들리는 공급망이 있다. 러시아산 가스에 이어 중동산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까지 공급 차질 위험이 커지면서 가격보다 안정적인 공급을 중시하는 '에너지 안보' 시대가 굳어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변화가 가장 뚜렷한 곳은 천연가스 시장이다. 유럽연합(EU)의 현재 천연가스 재고율은 65%로 최근 5년 평균(82%)에 크게 뒤처져 있다고 블룸버그가 지난 3일(현지시간) 전했다. 이란 전쟁으로 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은 여름철에 재고를 충분히 늘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이 겨울철에 대비하려면 100테라와트시(TWh) 이상의 가스를 추가로 저장해야 할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가격으로 70억유로(약 11조원)가 넘는 규모다.
◆ 유럽 동아시아 가스시장 동조화
유럽이 부족한 가스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카타르 등에서 LNG를 대거 사들이면서 과거 상대적으로 분리돼 있던 유럽과 동아시아 가스시장은 동조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유럽이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같은 물량을 놓고 경쟁하는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노남진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럽의 LNG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대표 지표인 TTF와 동아시아 LNG 현물가격의 대표 지표인 JKM이 거의 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TTF와 JKM은 지난 2월 말 중동 전쟁 발발 직전과 비교해 모두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도 중장기적인 부담으로 꼽힌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시장조사업체 리스타드에너지는 중동발 공급 차질이 장기화할 경우 TTF가 지난 2일 장중 MWh당 75.33유로(약 12만원)까지 올라 2023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것을 넘어 올겨울 100유로(약 16만원)를 넘어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공급을 단기간에 늘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주요 LNG 수출국인 카타르의 생산시설이 이란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데다 호르무즈 해협의 운송 차질도 계속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3일 카타르의 LNG 생산이 여전히 중단돼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대체 공급처의 여력도 제한적이다. 미국이 LNG 수출을 늘리고 있지만 기존 액화시설은 이미 높은 가동률을 유지하고 있어 생산량을 단기간에 대폭 늘리기 어렵다. 신규 LNG 생산시설을 건설하는 데도 수년이 걸리는 만큼 겨울철 수요가 급증하더라도 공급이 즉각 따라가기 어려운 구조다.
공급 여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올겨울 에너지 시장의 향방을 가를 최대 변수는 유럽과 동아시아의 기온이다. 두 지역에 한파가 동시에 닥치면 난방용 가스 수요가 급증하면서 LNG 현물시장의 물량 확보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수 있다.
다만 현재 상황을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후의 에너지 위기와 동일하게 보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럽이 가스 소비를 줄이고 LNG 수입시설을 늘리는 등 공급 충격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EU 집행위원회도 현재 가스 재고가 예년보다 낮지만 공급처 다변화와 LNG 수입능력 확대, 가스 수요 감소로 당장의 공급 부족 위험은 없다고 평가했다.
◆ 중국 원유 수요 회복 변수
LNG뿐 아니라 원유와 정제유 시장의 공급 불안도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러시아 정유시설이 잇달아 타격을 받으면서 휘발유와 디젤 등 석유제품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디젤 수출을 제한하고 휘발유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인도 등에서 연료를 들여오는 상황이다.
석유제품 공급이 빠듯해지면서 가격도 뛰고 있다. 미국의 평균 디젤 가격은 지난 4일 갤런당 5.85달러(약 7895원)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디젤 가격 상승이 장기화하면 운송비와 농산물 가격을 끌어올리는 등 물가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향후 주요 변수는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의 수요 회복이다. 중국은 중동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자 원유 수입을 줄이고 비축유를 꺼내 쓰면서 2분기 원유 수입량이 하루 평균 810만배럴로 1분기보다 32% 감소했다. 중국의 수입 감소는 중동발 공급 차질에 따른 유가 상승 압력을 일부 낮췄다. 중국이 연말이나 내년 초 수입을 다시 늘리면 글로벌 원유 수급은 한층 빠듯해질 수 있다.
◆ 에너지 '안보 프리미엄' 우선
반복되는 지정학적 충격은 각국의 에너지 확보 전략도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생산비가 낮은 국가에서 에너지를 대규모로 공급받는 것이 효율적이었지만, 러시아산 가스와 중동산 원유·LNG 공급이 잇달아 흔들리면서 특정 국가나 지역에 의존하는 방식의 위험이 커졌다. 이에 따라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장기계약과 현물 구매를 적절히 조합하는 한편 재고와 LNG 터미널 등 비상시에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확보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강문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저가에 에너지를 확보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며 "조금 더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에너지 안보와 경제 안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에너지 구매 시점을 분산하고 공급처를 다변화하는 등 조달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해야 한다"며 "저장시설을 충분히 활용하고 해외 에너지 개발 지분을 확보하는 등 공급 충격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제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