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목표 위해 경제력 활용
美, 관세무기 앞세워 합의 압박
규범·가치 기반 국제질서 붕괴
연방정부 입김 센 조선·방산은
워싱턴 정치권과 관계 다지고
투자할 지역 州정부도 챙겨야
지난 8~10일 사흘간 열린 제27회 세계지식포럼에서는 관세전쟁이 촉발한 대미관계의 변화와 위협, 그 상황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적 선택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펼쳐졌다. 왼쪽부터 앤드루 김 전 미국 CIA 부국장, 로버트 윌키 전 미국 보훈부 장관, 크리스 쿠싱 넬슨멀린스 대정부부문 리더, 스티븐 덜로프 시카고대 교수가 세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미국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끝난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의 산업 역량을 협상에 활용해야 한다." 지난 9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지식포럼 '한미동맹의 경제적 가치와 미래' 세션에서 스티븐 덜로프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이 지위와 힘을 이용해 (국제) 관계 조건을 바꾸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덜로프 교수는 불평등 연구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학자다. 그는 "미국이 정치적 목표를 위해 경제력을 활용하는 지경학(Geoeconomics)이 새로운 질서가 됐다"고 지적했다.
전통적인 국제질서가 규범과 가치에 기반해 움직였다면 이제는 관세와 투자를 앞세워 합의의 조건을 바꾸는 거래적 실용주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덜로프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이 트럼프 시대가 오면서 도드라진 측면이 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뉴노멀에 가까운 현상이기에 경제적 측면에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협상력이 중요하다"며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7~8%가 미국과의 직접 무역에서 나오고, 전체 교역액의 44%가 미국과 연관된 만큼 (미국 쏠림 현상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 韓 첨단기술·제조역량 어필해야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건 한국이 가진 전략자산을 통한 리스크 최소화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한국이 기술력을 갖춘 만큼 이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면 한미 관계에서도 일방적 열세에 몰리진 않는다.
로버트 윌키 전 미국 보훈부 장관은 "국방 전환 계획을 만들 당시 한국, 일본, 핀란드, 이탈리아 등을 포함시켰다"며 "현재 미 해군 전력이 1938년 이후 가장 작은 수준이다. 우리는 한국의 기술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해양 분야는 (미국의 압박에 대한)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안호영 경남대 교수는 "미국은 AI·양자·바이오·항공우주·반도체 분야 1위이지만, 제조 역량 부문은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면서 양국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앤드루 김 전 미국 CIA 부국장은 "첫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은 화웨이를 제재했다. 그리고 동맹국에 의존하기로 하고 삼성과 유럽 제조사들을 우호 기업으로 지정했다"고 말하면서 "AI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협력해 공통 언어로 AI 표준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당위성을 설명했다.
◆ 트럼프 행정권 남용 우려 더 커져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압박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2기 후반기 국정운영 향방을 가를 중간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민주당이 연방 하원 다수당 지위를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민주당이 유리한 국면이지만, 이는 반대로 트럼프 행정부의 입법 시도가 무력화돼 관세를 비롯한 대통령의 행정권 활용이 커질 리스크를 더 크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우려다.
'미국의 변곡점, 중간선거를 말하다' 세션에서 크리스 쿠싱 대정부부문 리더 겸 워싱턴사무소 총괄대표는 "민주당이 하원을 탈환하면 트럼프 행정부의 입법 동력이 약화될 것이다. 인플레이션감축법이나 반도체 지원법과 같은 굵직한 산업정책이 새로 나올 여지도 적다"면서도 "의회의 경제가 강해질수록 행정권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관세와 무역정책이 주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은 새로운 지원책을 기다리기보다 현재 제도를 토대로 투자하고 현지 정치권과 관계를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쿠싱 리더는 "투자할 금융자본을 마련하듯 정치적 자본도 쌓아야 한다"며 투자 지역의 주 정부·정치권과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방산처럼 연방정부 영향력이 큰 산업은 워싱턴에 집중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지혜 기자 / 신지윤 기자 / 이지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