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우 NH농협금융그룹 회장이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팁스타운S6에서 열린 중소벤처기업부-금융위원회-5대 금융그룹 업무협약식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찬우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이 취임 당시 내건 ‘금융사고 제로’ 구호가 잇따라 드러난 금융사고와 계열사 비리 의혹 앞에서 빛을 잃고 있다. 사고가 불거질 때마다 내부통제 강화책을 내놨지만 이 회장 취임 첫해에만 총 275억원 규모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금융감독원장이 “비리 혐의가 짙다”고 평가한 계열사 판촉물 계약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농협금융 내부통제 성적표가 향후 이 회장의 연임 여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 회장은 지난해 2월 취임 직후부터 금융사고 근절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취임 다음 날 첫 공식 일정으로 농협은행 고객행복센터를 찾은 그는 “금융사고를 최소화하고 제로화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책무구조도 등 시스템을 통한 내부통제 관리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취임사에서도 고객 신뢰가 없다면 금융회사의 성장과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며 내부통제 체계를 재정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회장이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을 지낸 만큼 농협금융에서 반복된 금융사고를 끊어낼 적임자라는 기대도 받았다.
취임 한 달여 뒤인 지난해 3월에는 이 회장이 직접 내부통제협의회를 주재했다. 농협금융은 책무구조도 운영 실태와 대표이사·임원의 관리의무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내부통제 취약 부문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도 “내부통제 실패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 책임경영을 확립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아 200억원대 금융사고가 공개됐다. 농협은행은 지난해 4월 대출상담사가 다세대주택 감정가를 부풀려 주택담보대출을 과다하게 실행한 204억9310만원 규모의 금융사고를 공시했다. 사고가 벌어진 기간은 2022년 2월부터 2023년 4월까지로 이 회장 취임 전이었지만, 약 2년간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농협은행의 여신심사와 사후 점검 체계가 도마 위에 올랐다. 농협은행은 자체 감사를 통해 사고를 적발했으며 감사 완료 후 고소 등 조치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찬우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이 10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금융감독원장-금융지주회장 간담회에 참석해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의 인사말을 경청하고 있다. 뉴시스 이 회장은 사고 공시 일주일 뒤 내부통제를 다시 강조했다. 지난해 4월 10일 전 임직원에게 보낸 최고경영자 메시지에서 “고객의 신뢰 없이 금융회사의 미래는 없다”며 금융사고 예방을 최우선으로 실천해 달라고 주문했다. 농협금융은 금융사고 유형별 사례와 책무구조도, 임직원 행동강령 등을 다루는 윤리·준법교육을 매주 한 차례 실시하고 자가진단과 참여형 캠페인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강화책 발표 이후에도 과거 횡령이 뒤늦게 드러나거나 새로운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해 5월에는 농협은행 영업점 직원들의 시재금 횡령 사건이 잇따라 드러났다. 경기 의왕시의 한 영업점 직원은 2024년 12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13차례에 걸쳐 시재금 2565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또 다른 경기지역 영업점에서는 지난해 5월 신입 행원이 시재금 약 200만원을 횡령했다가 적발됐다. 농협은행은 두 번째 사건을 발생 다음 날 발견해 인사 조치했다고 설명했다. 액수는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직원이 내부 프로그램에 허위 기록을 입력해 현금을 빼돌린 것으로 조사되면서 기본적인 현금 관리와 상호 점검 절차에도 허점이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회에 제출된 자료에서도 사고 규모가 확인됐다. 농협은행에서 지난해 1월부터 7월까지 집계된 금융사고는 8건, 사고금액은 275억4200만원이었다. 2021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발생한 금융사고는 모두 38건, 800억6000만원으로 이 가운데 당시 회수된 금액은 125억1800만원에 그쳤다. 전체 회수율은 약 16%였고, 지난해 사고금액의 회수율은 당시 기준 2.4%였다.
지난해 10월에는 계열사인 NH농협생명의 판촉물 구매를 둘러싼 비리 의혹도 불거졌다. 농협생명이 2024년 말 고객 사은품용 핸드크림을 구매하면서 체결한 수의계약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하청 거래와 자금 유출이 있었다는 의혹이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비리 혐의가 굉장히 짙다”며 위법 사실이 확인되면 엄정하게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이후 현장검사를 거쳐 올해 관련 직원을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계약은 이 회장 취임 전에 체결됐지만 의혹이 불거지고 금융당국 검사가 진행된 것은 취임 이후다. 농협금융이 문제를 언제 인지했고 자체 감사에서 무엇을 확인했는지, 책임자에게 어떤 조치를 했는지는 이 회장의 내부통제 성적표와 직결된다.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던 이 회장의 약속이 일선 직원의 징계에만 머물렀는지, 담당 임원과 계열사 경영진까지 향했는지도 연임을 앞둔 핵심 검증 대상이다.
농협금융도 내부통제 강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농협은행은 지난해 10월 자체 내부통제 전문가를 육성하는 ‘NH내부통제전문가’ 인증제도를 도입했다. 올해 들어서도 농협금융은 책무구조도의 안정적인 정착과 금융사고 재발 방지를 논의하는 내부통제협의회를 열었다. 이 회장은 지난 1월 경영전략회의에서도 “금융의 본질은 신뢰”라며 소비자 보호와 내부통제 강화를 거듭 주문했다.
이찬우 NH농협금융 회장이 17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에서 열린 국민성장펀드의 성공을 위한 금융기관간 업무협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형 여신사고가 줄어든 점은 개선 성과로 꼽힌다. 농협은행은 지난해 4월 이후 올해 8월까지 16개월 동안 10억원 이상 수시공시 대상 여신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만 이는 ‘10억원 이상 여신사고’를 기준으로 한 결과로, 소액 횡령이나 다른 유형의 금융사고까지 모두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부통제 강화책의 실효성을 평가하려면 전체 사고 건수와 금액뿐 아니라 적발에 걸린 기간과 피해 회수율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회장의 연임을 둘러싼 경영 여건은 나쁘지 않다. 농협금융이 이 회장 취임 이후 최대 실적을 냈고 비은행 계열사의 실적과 자본 건전성도 개선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농협중앙회와 별다른 갈등을 노출하지 않았다는 점도 연임에 긍정적인 요소로 거론된다.
하지만 최근 KB금융이 시장의 예상을 깨고 양종희 회장의 연임 대신 이재근 부문장을 차기 회장 후보로 선택하면서 실적만으로 현직 회장의 연임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이 회장의 임기는 2027년 2월 2일까지다. 농협금융은 회장 임기가 3년인 다른 금융지주와 달리 2년이며, 과거 김용환·김광수 전 회장이 각각 1년씩 연임한 사례가 있다.
차기 회장 선임 절차가 이르면 오는 11월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내부통제 개선 여부가 이 회장의 주요 평가 항목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특히 금감원 출신인 이 회장이 ‘금융사고 제로’를 직접 약속한 만큼 추가 사고가 발생하거나 농협생명 의혹의 책임 범위가 경영진으로 확대될 경우 연임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