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보다 소재·철학 찾는 소비, 디자이너 브랜드 소비로 확산
로로피아나·쿠치넬리 등 로고 대신 소재·장인기술 강조
중산층 소비 위축에도 하이엔드는 성장…명품시장 양극화 '뚜렷'[이데일리 박지애 기자] 깔끔하고 단정한 갈색 코트 한 벌. 가슴팍에도, 소매에도 한눈에 알아볼 만한 로고는 없다. 그런데 가격은 1320만원이다.
이탈리아 하이엔드 브랜드 로로피아나가 최고급 캐시미어로 만든 ‘그레이슨 코트’다. 화려한 로고 대신 희소한 원단과 정교한 재단, 장인기술이 가격표를 설명한다.
|
과거에는 샤넬의 ‘더블C’나 루이비통의 모노그램처럼 누구나 알아보는 로고가 명품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옷의 소재와 만듦새를 알아보는 사람끼리만 가치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로고 사라진 자리 ‘원단’…명품 불황에도 잘 나간다
18일 패션업계에 따르면 올해 가을·겨울(FW) 시즌에도 글로벌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화려한 로고 대신 최고급 소재와 장인기술을 앞세우고 있다.
대표적인 브랜드가 로로피아나다. 캐시미어와 울을 중심으로 한 로로피아나는 일반 소비자가 외관만 보고는 구분하기 어려운 원단 자체를 브랜드 자산으로 삼는다. 극세 메리노울을 사용한 ‘기프트 오브 킹스(Gift of Kings)’, 울과 실크를 결합한 ‘로열 라이트니스(Royal Lightness)’ 등 독자적인 고급 소재가 대표적이다. 패션지 보그는 로로피아나의 경쟁력을 유행보다 소재를 알아보는 ‘감식안(connoisseurship)’에서 찾기도 했다.
브루넬로 쿠치넬리 역시 캐시미어를 중심으로 고급 원단과 정교한 수작업을 브랜드 정체성으로 삼는다. 메리케이트·애슐리 올슨 자매가 만든 더 로우도 로고를 최소화한 채 재단과 실루엣으로 브랜드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스텔스 웰스(stealth wealth)’ 브랜드로 꼽힌다.
과거 ‘콰이어트 럭셔리’가 베이지·회색 등 무채색과 미니멀한 디자인을 뜻했다면 최근에는 ‘조용하게 생긴 옷’보다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소재와 재단, 질감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모습이다. 로고가 사라진 자리를 원단과 만듦새가 채우고 있는 셈이다.
명품시장 침체 속에서도 이들 브랜드의 선전은 눈에 띈다.
루이비통·디올·로로피아나 등을 거느린 LVMH의 올해 상반기 패션·가죽제품 부문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5% 감소했지만 로로피아나는 같은 기간 ‘뛰어난 실적’을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로로피아나 매출도 전년 대비 7.5% 증가했다. 브루넬로 쿠치넬리 역시 지난해 연간 매출이 두 자릿수 증가했다.
|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최상위 소비층의 달라진 과시 방식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로고가 명품의 가격과 가치를 보여주는 가장 직관적인 수단이었다면 최근에는 오히려 브랜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또 다른 차별화 방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대표적이다. 그가 평소 즐겨 입는 겉보기엔 평범한 회색 티셔츠는 브루넬로 쿠치넬리가 제작한 약 400달러 상당의 맞춤 제품으로 알려졌다.
이수진 박사는 “마케팅·소비자학에서는 로고가 보이지 않는 제품을 오히려 선호하는 현상을 ‘인컨스피큐어스 컨섬션(inconspicuous consumption·비가시적 소비)’으로 설명한다”며 “로고 없이도 제품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데서 자신의 안목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한발 더 나아가 큰 로고 자체를 꺼리는 소비자도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박사는 “명품 소비에 익숙한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로고가 크게 드러나는 제품을 두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그것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며 “과거에는 로고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다고까지 여기지는 않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일종의 ‘역브랜딩’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누구나 알아보는 로고 대신 같은 브랜드를 경험한 사람만 읽어낼 수 있는 소재와 재단, 실루엣이 새로운 신호가 되는 셈이다. 이 박사는 “브랜드들도 로고 플레이보다는 고유의 형태나 박음질, 소재처럼 오랜 경험이 있어야 알아볼 수 있는 요소를 은은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변화는 명품시장의 소비 양극화와도 맞물린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최근 2년간 약 7000만명의 소비자가 명품시장에서 이탈했다. 가격 인상 등으로 중산층의 ‘열망 소비’가 위축되는 사이 가격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최상위 소비층은 희소한 소재와 장인기술을 앞세운 초고가 제품 소비를 이어가면서 소비층 간 온도차가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소재를 보는 소비’ 중가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
LF의 프리미엄 편집숍 라움이 전개하는 일본 여성복 브랜드 ‘마메 쿠로구치’가 대표적이다. 일본 전통 장인정신과 현대적인 기술을 결합한 텍스타일과 자카드, 자수 등을 앞세워 로고보다 소재와 디테일로 브랜드 정체성을 드러낸다.
소비자 반응도 나타나고 있다. 올해 봄·여름(SS) 시즌 라움에서 마메 쿠로구치 매출은 직전 시즌보다 30% 증가했고 구매 고객 재구매율은 80%를 넘어섰다. 라움은 올해 FW 바잉 규모를 40% 이상 확대했다.
또 다른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 아키라나카 역시 2024년 SS 시즌 라움 입점 이후 매 시즌 구매 고객의 70% 이상이 재구매 고객이다. 1인당 평균 구매액도 2024년 SS 대비 올해 SS 약 30% 늘었다.
업계에서는 이처럼 높은 재구매율에 주목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로고나 대중적인 브랜드 인지도보다 소재와 디자인, 브랜드 고유의 색깔을 보고 제품을 선택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며 “한 번 브랜드의 가치를 경험한 고객이 다시 찾는 경향도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