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7일 서울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월세 물건이 붙어 있다. photo 뉴스1내년 가을 결혼을 계획하는 20대 직장인 윤모씨는 최근 남자친구와 신혼집 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애초 전셋집을 얻어 신혼을 시작하려던 윤씨였지만 최근 들어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남자친구가 '최대한 은행 빚을 내서 매매로 사자'는 말에 흔들리는 것. 이러한 배경에는 서울 시내 전세물건이 급감한 탓이 크다. 윤씨는 "전세 매물은 찾기도 어렵다"며 "부모님은 '무리해서 집 사지 말고 전세부터 시작하라'고 했지만 그건 옛날 얘기"라고 토로했다. 그동안 전세는 서울의 높은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주택자들에게 사실상의 중간지대 역할을 해왔다.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의 독특한 임대차 방식으로 자리 잡은 전세는 신혼부부나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는 '주거 사다리'였던 것이다.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하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30대 김모씨 역시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지금 사는 집과 비슷한 조건의 전셋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비슷한 조건을 갖춘 전세 매물은 보증금이 크게 올랐는데, 더 큰 문제는 전세 매물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주변 부동산에서는 보증금을 낮추고 월세를 내는 반전세 매물을 권할 정도다. 경남 창원에서 상경한 김씨는 "집을 사는 것은 진작 포기했는데 전세마저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이럴수록 대출을 최대한 받아 집을 사는 게 맞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중랑·노원·금천부터 덮친 '전세 실종'
서울 시내 임대차 거래 형태가 전세에서 월세로 급격히 변하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6월 서울 아파트 임대차 거래 가운데 월세 거래 비중은 54.1%로 집계됐다. 전세는 45.9%에 그쳤다. 지난해 12월 이후 전세와 월세가 5 대 5 수준을 유지하다 월세가 전세를 크게 앞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월세화'는 특히 강남3구 등 고가주택 지역뿐 아니라 노원·중랑·금천 등 그간 중저가 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월세화가 기존 중산층·서민의 '주거 사다리'까지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10년 전만 해도 달랐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4월 서울 아파트 임대차 거래 가운데 월세 비중은 34.4%에 불과했다. 전세가 65.6%로 월세의 두 배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4월에는 월세 비중이 49.8%로 전세(50.2%) 비율을 거의 따라잡았고 두 달 뒤 결국 월세 비율은 전세를 넘어섰다. 실제 시장에 나온 전세 물건 자체도 급격하게 감소했다.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지난 4월 18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1만5427건이었다. 2년 전 3만750건과 비교하면 49.9% 감소했다. 불과 2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전세 감소와 월세화가 나타나는 지역이다. 지난 4월 기준 서울 아파트 임대차 거래 가운데 월세 비중이 가장 높은 자치구는 중랑구로 73.5%를 기록했다. 뒤이어 용산구(64.8%), 중구(63.0%), 종로구(57.6%), 금천구(57.5%) 순이었다. 전세 매물 감소 역시 서울 중심보다 외곽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2024년 4월과 비교해 올해 4월 노원구의 아파트 전세 매물은 무려 88.5% 감소했다. 중랑구(-88.0%), 강북구(-83.5%), 성북구(-83.4%), 금천구(-77.1%)가 뒤를 이었다. 당시 시장에 나온 전세 매물은 각각 중랑구 51건, 강북구 50건, 금천구 54건에 불과했다.
이들은 강남3구와 성격이 다르다. 상대적으로 서울 아파트 가운데 가격대가 낮아 신혼부부나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전세 또는 매매를 선택해온 지역들이다. 지난 6월 서울 아파트 매매 거래량도 노원구가 614건으로 25개 자치구 가운데 가장 많았고 강서·성북·구로·도봉·은평구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15억원 이하 아파트가 전체 거래의 90% 이상을 차지했다.
전세 물건이 줄면서 가격도 뛰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5월 서울 아파트 전세 실거래가격은 한 달 전보다 1.04%, 지난해 같은 달보다 10.9% 상승했는데, 노원·도봉·강북·중랑 등이 포함된 서울 동북권은 한 달 만에 2.25% 뛰었다. 특히 동북권의 경우 1년 사이 12.11% 뛰어 서울 5개 권역 가운데 상승폭이 가장 컸다.
'월세→전세→자가' 공식이 깨졌다
전세 감소를 단순한 임대차 시장의 변화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동안 전세가 무주택자의 자산 형성 과정에서 일종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사회초년생 때 월세에서 출발해 목돈을 모으거나 결혼할 시점에 전세로 옮기고, 전세보증금에 추가 자금을 보태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로였다. 특히 집값이 높은 서울에서 당장 주택을 사기 어려운 중산층·서민에게 전세는 월세와 자가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세가 줄고 월세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삶의 방식도 흔들리고 있다. 전세보증금은 계약이 끝나면 돌려받을 수 있지만 월세는 매달 발생하는 주거비다. 전세로 거주하면서 소득의 일정 부분을 저축해 주택 구입 자금을 마련했던 가구가 월세로 이동할 경우 그만큼 자산을 축적할 여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월세 자체에 대한 부담도 커지고 있다. 전용 40~60㎡ 서울 아파트 월세가격지수는 지난해 5월 95.6에서 올해 5월 103.8로 1년 사이 8.6% 상승했다. 지난 7월 서울 전체 아파트 평균 월세는 162만원으로 월별 기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매달 100만원이 넘는 돈을 주거비로 지출해야 하는 가구가 늘어날수록 내 집 마련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월세를 내며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이들도 많지 않다. 앞서 예비 신혼부부인 윤씨는 "차라리 월세를 들어갈까 생각은 해봤다"면서도 "대학생 원룸도 아니고 (월세는) 매달 돈을 땅에 버리는 수준이라 바로 접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전세 가격 역시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지난 5월 서울 전용 40~60㎡ 아파트 전세 실거래가격은 전년 동월보다 11.8% 상승했다. 지난 7월 서울 전체 아파트 평균 전세가격은 7억원을 넘어섰다. 결국 서울 무주택 가구 입장에서는 '매달 높은 월세를 부담하느냐, 비싸진 전세를 감당하느냐, 대출을 최대한 끌어 집을 사느냐'는 선택지만 남게 되는 셈이다.
물론 서울 밖을 바라보면 또 다른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서울 집값과 전셋값이 함께 오르는 상황에서는 한 번 서울 밖으로 밀려나면 다시 진입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앞서 직장인 김씨는 "솔직히 김포나 안양도 알아봤다"면서도 "직장도 서울 시내고 한 번 (서울 밖으로) 튕겨져 나가면 들어올 수 없는 게 팩트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특히 노원·중랑·금천 등 중저가 지역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은 주택 시장 전체에 경고등으로 다가온다. 상대적으로 주거비가 낮은 지역을 찾아온 무주택 가구에는 월세 전환이 사실상 주거 사다리의 붕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진형 광운대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1가구 1주택'이나 '실거주 의무' 등의 정책들이 취지는 좋지만 '정책의 역설'로 인한 부작용들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며 "매매가격이 치솟은 이후 전세가격도 급등하면서 임차인 부담만 커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