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7일까지 4주 더 동결
손실 보상 책정 예산 5.6조 달해
통제 장기화땐 소비억제 효과 뚝
국내와 국제가격 사이 괴리 커져
자칫 시장 가격결정기준 흔들릴 판
정유사 등 업계와 보상 놓고 이견도
충남 서산 제3차 정부석유비축 지상탱크. 연합뉴스미국·이란 전쟁 장기화로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석유제품 최고가격을 동결했다. 추석을 앞두고 소비자물가 인상을 막기 위한 조치다.산업통상부는 18일 현행 석유제품 최고가격을 유지하면서 적용 기간을 4주 더 연장하는 내용의 10차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19일 0시부로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내 정유 4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석유제품의 도매가에는 10월 17일 0시까지 ℓ당 휘발유 1784원, 경유 1773원, 등유 1380원의 상한가가 적용된다.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는 3월 13일 첫 시행 이후 7개월째 이어지게 됐다.
석유류 가격 안정을 위한 추가 조치도 함께 나왔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추석 연휴인 24~27일 전국 고속도로 주유소의 유류 가격을 ℓ당 100원 인하하고 유류세 인하 조치도 11월 말까지 두 달 더 연장한다”고 이날 밝혔다. 유류 가격 인하 대상은 한국도로공사가 관리하는 재정 고속도로 주유소 226곳이다.
문제는 최근 유가가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거래소 현물 기준 두바이유 가격은 9일 이후 꾸준히 배럴당 120달러를 웃돌고 있다. 선물 가격 역시 배럴당 120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정부가 최고가격 정산을 위해 마련한 4조 2000억 원의 예비비도 조만간 바닥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정유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제유가가 오르면 3~4주 시차를 두고 국내시장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정부는 예산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이는 정유사들의 기회비용을 뺀 계산”이라고 지적했다.
18일 서울 서초구 경부고속도로 만남의광장 휴게소 주유소에서 시민들이 주유를 하고 있다. 뉴스1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를 유지하는 것은 재정을 써서라도 물가를 묶어두는 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재정경제부는 최고가격제가 지난달 소비자물가를 0.5%포인트 완화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최고가격제가 없었다면 8월 소비자물가가 3% 후반대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의미다.하지만 전문가들은 출구전략이 겨울철까지 미뤄질 경우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미 손실보상을 위해 책정한 예산이 5조 6500억 원에 달하는 등 재정 지출이 막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반면 가격 통제가 길어지면서 소비 억제 효과는 약해지고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겨울철에는 화석연료 수요가 높아져 혼란이 더욱 가중될 수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날 “최근 국제유가와 석유제품 가격이 상승하고 있지만 서민 물가 부담과 민생 안정에 무게를 두고 석유제품 최고가격은 동결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환율이 급락하면서 유가 충격에 완충 역할을 했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아시아 국가들에 원유를 판매할 때 붙이는 프리미엄(OSP)이 마이너스 가격을 유지 중이라는 점도 동결 배경으로 지목됐다.
최고가격제가 당장 중단될 경우 물가 충격은 상당한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8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29.64로 전년 동월 대비 7.9% 올랐다. 생산자물가는 4월 이후 꾸준히 전년 대비 7~8%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가 당초 이달 말 종료 예정이던 휘발유·경유에 대한 유류세 한시적 인하 조치를 11월 30일까지 2개월 연장하기로 한 것도 명절 앞 물가를 최대한 안정시키기 위해 최고가격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다.
문제는 가격 통제가 길어질수록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4월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115만 5606㎘(킬로리터)로 전년 대비 7.4% 감소했다. 당시 최고가격 자체가 ℓ당 1900원대여서 소비자가격이 크게 뛰자 가격이 보내는 신호에 맞춰 소비량이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5월 이후 최고가격이 큰 변동 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소비량 감소 폭도 1~2% 범위에서 정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은 가격 그 자체뿐 아니라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국제 가격과 국내 가격이 연동됐다면 소비량도 이에 맞춰 줄었을 텐데 가격을 억누르다 보니 제대로 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정유 업계의 한 관계자도 “일률적으로 가격을 낮추기보다 유가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는 취약 계층에 한해 지원하는 방식이 나았을 것”이라며 “난방 수요도 생기는 겨울철에는 가격 발견 기능이 더욱 망가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석유제품 가격과 국제 가격 사이의 괴리가 커지면서 재정 투입이 과도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현재 최고가격이 설정된 6월 말에는 싱가포르거래소 현물 기준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70달러를 밑돌았다. 그런데 이달 들어 최근 중동 불안이 가중되면서 2일 배럴당 100달러를 넘더니 9일에는 120달러 선도 돌파했다.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 역시 100달러를 웃돌고 있는 상황이다. 손 교수는 “국제 유가가 크게 오른다는 것은 정유사 도입가가 오른다는 말”이라며 “그런데 최고가격은 고정돼 있으니 손실을 보전하는 데 드는 재정 소요는 상당히 커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앞서 정부는 올해 약 6개월간 최고가격제를 유지한다고 보고 4조 2000억 원의 손실보상 예산을 추가경정예산으로 편성했다. 이후 내년 예산안에는 4분기 최고가격제 손실보상 예산으로 1조 4497억 원의 사업비를 잡아뒀다. 올해 3개 분기 동안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하는 데만 5조 6500억 원에 달하는 예산이 들어갈 것이라고 추산했다는 이야기다.
정작 정부는 이처럼 예산을 잡아두고도 정산에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7월께 정유사에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최고액 정산위원회를 출범했지만 지급 기준을 두고 업계와 이견을 해소하지 못해 여태 1차 정산(3월 13일~6월 30일분)도 마치지 못했다. 정유사들은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가격에 기반해 기회비용까지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는 회계상 원가에 기반해 영업 손실을 메워주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는 이달 말까지 업계로부터 1차 정산 자료를 받은 뒤 연말까지 보상액을 심사하겠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