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백만장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일부 초고액 자산가의 재산이 불어난 결과만은 아닙니다. 월급에서 자동 적립되는 퇴직연금, 장기 주식투자, 주택자산, 그리고 글로벌 시장에서 돈을 버는 미국 기업의 주주환원이 맞물리면서 가계와 증시가 서로를 끌어올리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UBS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에서 새로 생긴 달러 백만장자는 약 100만 명입니다. 이 가운데 44만 명 이상이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UBS는 부채를 뺀 개인 순자산이 100만달러를 넘는 성인을 백만장자로 정의합니다. UBS 계좌 보유 여부가 아니라 56개 시장의 가계 자산·부채 통계와 조사 자료를 토대로 추정한 수치입니다. 미국에 집중된 백만장자
UBS 기준 미국 거주 성인 백만장자는 약 2200만~236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미국 성인 인구의 약 8.5~8.8%, 성인 11~12명 중 1명에 해당합니다. 전 세계 백만장자 약 5750만 명 가운데 약 40%가 미국에 몰려 있는 셈입니다.
다만 ‘백만장자’의 숫자는 무엇을 자산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소비자금융조사(SCF)는 개인이 아니라 가구 단위로, 주택 지분과 401k·IRA 등 은퇴계좌를 포함한 순자산에서 모기지 등 부채를 제외해 계산합니다. 이 기준의 백만장자 가구는 약 1600만~1700만 가구로, 전체 미국 가구의 12~13% 수준입니다.
반면 프랑스계 컨설팅 기업 캡제미니의 고액순자산보유자(HNWI) 기준은 더 엄격합니다. 주 거주지와 명품·수집품·소비재를 빼고 현금, 주식, 채권 등 투자 가능한 금융자산이 100만달러 이상인 사람만 집계합니다. 이 기준에서 미국 HNWI는 약 870만 명으로, 전 세계 HNWI의 34.4%를 차지합니다. 부동산에 묶인 자산을 제외하기 때문에 금융투자 업계에서 운용 가능한 자산의 규모를 볼 때 주로 활용합니다. 월급에서 증시로, 401k의 복리
미국의 백만장자 저변을 넓힌 핵심 장치 가운데 하나는 401k입니다. 직장인이 월급 일부를 세전으로 적립해 펀드에 투자하고, 회사가 일정 비율을 추가 적립해주는 퇴직연금 제도입니다. 은퇴 때까지 운용수익에 대한 과세가 이연되는 만큼, 긴 시간 동안 적립과 복리가 결합될 수 있습니다.
많은 가입자는 S&P500 추종 인덱스펀드나 타깃데이트펀드를 통해 주식시장에 장기 투자합니다. 피델리티에 따르면 이 회사 가입자 중 잔액이 100만달러를 넘는 401k 계좌는 2025년 2분기 말 59만5000개, 3분기 말 65만4000개로 늘어 역대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전형적인 ‘401k 밀리어네어’는 약 59세로, 약 25년 동안 꾸준히 저축해 왔으며 잔액 중앙값은 약 140만달러였습니다.
이는 고소득 전문직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장기간 적립한 은퇴자금과 주택 한 채가 함께 불어나면서 50~60대에 순자산 100만달러를 넘는 가구가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가계 자금이 시장으로 유입돼 시장을 키우고, 상승한 시장이 다시 가계의 자산을 늘리는 선순환입니다.
주식 보유의 저변도 넓습니다. 갤럽 조사에서는 미국 성인의 약 61~62%가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개별 종목 직접투자뿐 아니라 401k, IRA, 뮤추얼펀드를 통한 간접 보유를 포함한 수치입니다. 연소득 10만달러 이상 집단의 보유율은 87%, 5만~10만달러 집단은 71%, 5만달러 미만 집단은 28%였습니다.
Fed의 SCF로 가구 단위에서 봐도 전체 가구의 약 58%가 주식자산을 보유합니다. 은퇴계좌와 펀드를 통한 간접 보유가 약 54%이고, 개별 주식 직접 보유는 약 21%입니다. 2019년 이후 모바일 브로커리지 확산으로 직접 보유 비중도 높아졌습니다. 주식 보유액은 중앙값과 평균값의 격차가 매우 큽니다. 중간 가구의 보유액은 약 5만2000달러지만, 상위 계층의 대규모 자산 때문에 평균은 약 48만9000달러로 올라갑니다. 빅테크와 AI 랠리가 키운 자산 효과
자동 적립만으로 최근의 자산 증가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팬데믹 이후 유동성 확대에 더해 애플·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알파벳 등 대형 기술주의 실적 개선과 AI 인프라 투자 열풍이 S&P500과 나스닥을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주식 비중이 높은 가계와 고액자산가일수록 이 랠리의 혜택을 크게 받았습니다. 현금 비중을 줄이고 주식 비중을 높인 투자자에게 초과수익이 집중되면서 백만장자 증가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다만 이 과정은 자산 격차를 더 키우는 측면도 있습니다. 주식을 보유하지 않거나 보유 비중이 낮은 가계는 같은 상승장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혜택을 받습니다.
미국 기업의 주주환원도 이 선순환을 강화합니다. S&P다우존스인덱스에 따르면 2025년 S&P500 기업의 자사주 매입은 1조1000억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1분기 매입액은 2935억달러로 분기 기준 최대였고, 2분기에도 2346억달러에 달했습니다. 2025년 9월 말 기준 최근 12개월간 애플은 967억달러, 알파벳은 558억달러, 엔비디아는 518억달러, 메타는 442억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사들였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벌어들인 현금이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통해 미국 주주에게 돌아가고, 주주는 다시 주식과 연금펀드에 투자합니다. 기업의 이익과 가계의 금융자산이 맞물리는 구조입니다. 조정장에서도 남는 자동 매수401k와 IRA는 시장의 단기 변동과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돈을 넣는 경향이 강합니다. 급여일에 맞춰 투자금이 인덱스펀드로 들어가는 만큼, 조정장에서는 적립식 매수 자금이 저가 매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일반 공모펀드처럼 시장 하락 때 즉각 대규모 환매가 나오는 구조와도 다릅니다.
401(k) 자산의 약 3분의 2는 주식에 노출돼 있습니다. 이 자금이 시가총액 가중형 지수를 추종할 경우, 시가총액이 큰 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애플 같은 종목으로 더 많은 자금이 기계적으로 흘러갑니다. 주가 상승이 지수 내 비중 확대를 부르고, 비중 확대가 추가 자금 유입으로 이어지는 자기강화 효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미국 증시의 회복력을 높이는 요인이지만 위험도 있습니다. 지수 상승이 소수 초대형 기술주에 크게 의존할수록, 이들 기업의 실적이나 밸류에이션에 대한 기대가 흔들릴 때 지수 전체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습니다. 러셀2000 등 중소형주와 대형주 간 성과 차이가 장기간 벌어지는 현상도 이런 집중도를 보여줍니다. ‘팔지 않는’ 투자와 세금의 복리
미국의 부유층은 자산을 지키는 방식에서도 시장의 장기 수요를 뒷받침합니다. 핵심은 ‘바이 앤드 홀드(Buy & Hold)’, 즉 우량주를 장기 보유하는 전략입니다.
주식을 매도해 차익을 실현하면 연방 및 주정부 자본이득세가 발생합니다. 반대로 매도하지 않으면 세금으로 나갈 돈까지 자산 안에 남아 복리로 운용됩니다. 현금이 필요할 때는 보유 주식을 처분하기보다 담보대출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가 상승분과 배당을 계속 보유하면서 유동성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 뒤 상속 시점의 가치가 취득가액으로 새로 잡히는 ‘스텝업(step-up in basis)’ 규정도 장기 보유 유인을 높입니다. 상속인은 피상속인이 보유하던 기간의 미실현 자본차익에 대해 일반적으로 자본이득세를 부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는 현행 세법에 따른 것으로, 향후 세제 개편 논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장기 보유 성향과 기업의 자사주 매입이 겹치면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 물량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수요와 공급 감소가 동시에 작용하는 국면에서는 주가 상승 압력이 커집니다. 시장을 지키려는 기대, ‘Fed 풋’
주식시장 참여 인구가 넓어진 만큼 증시 하락은 소비와 경기에도 더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면 가계의 체감 부가 감소하고,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70%를 차지하는 소비가 위축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은퇴자와 은퇴를 앞둔 유권자의 자산은 증시 변동에 민감합니다.
이 때문에 시장에는 위기 때 연준이 금리 인하나 유동성 공급으로 금융여건을 완화할 것이라는 ‘Fed put’ 기대가 존재합니다. 풋옵션이 가격 하락 위험을 막아주는 것처럼 연준이 증시 하락의 안전망이 될 것이라는 비유입니다. 연준에 주가 방어라는 법적 책무가 있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연준은 물가안정과 고용이라는 의무를 우선합니다. 다만 금융불안이 소비와 고용, 신용시장으로 번질 경우 정책 대응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의 기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상장사 밖의 부자들, 패스스루 사업체
미국의 부 축적은 월가와 빅테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경제학자 오언 자이더와 에릭 즈윅은 최근 저서 『더 에브리웨어 밀리어네어(The Everywhere Millionaire)』에서 재무부와 국세청(IRS) 세무자료를 분석해, 1985년 이후 상위 1% 소득 비중 상승분의 절반 이상이 상장 대기업이나 월가가 아닌 비상장 패스스루(pass-through) 사업체에서 나왔다고 분석했습니다.
자동차 딜러십, 음료·자재 도매망, 전문 의료 클리닉, 대형 로펌, 프랜차이즈 사업체 등이 대표적입니다. 일정 요건을 충족한 패스스루 사업체는 법인 단계에서 별도 법인세를 내기보다 사업 이익이 소유주의 개인소득으로 귀속되는 구조를 활용합니다. 이들이 창출한 현금흐름은 상업용 부동산과 금융자산으로 다시 유입됩니다.
저자들은 테크·금융권 밖에서 순자산 500만달러 이상을 쌓은 사업주가 약 300만 명에 이르며, 이들의 평균 순자산은 약 2500만달러라고 추정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백만장자’가 미국 부의 또 다른 축이라는 의미입니다. 30년 고정금리 모기지가 만든 자산 방어막주택도 미국 가계 자산의 중요한 엔진입니다. 미국은 30년 고정금리 모기지가 널리 보급돼 있어, 저금리 시기에 주택을 매수한 가계는 이후 금리가 올라도 기존 대출금리가 바뀌지 않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임금과 주택가격이 오르면 부채의 실질 부담은 낮아지는 반면 집값 상승분은 자산으로 남습니다.
미국 주택담보대출 보유자 가운데 80% 이상은 5% 미만의 금리를 적용받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 대출의 약 60%는 4% 미만, 3% 이하의 초저금리 대출도 20% 이상입니다. 팬데믹 이후 주택가격 상승은 주택 한 채와 은퇴계좌를 가진 가계의 순자산을 크게 늘렸습니다. 기업의 힘이 가계의 부로 돌아오는 구조
미국 백만장자 확대의 저변에는 401k와 주택이 있습니다. 100만~200만달러 자산 구간에서는 평범한 직장인이 장기간의 연금 적립, 주식투자, 고정금리 모기지를 통해 복리 효과를 누리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그 위에는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미국 기업의 이익과 주주환원이 있습니다. 기업은 깊은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투자와 실적을 만들고, 이익은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주에게 돌아갑니다. 여기에 비상장 지역 사업체의 현금흐름과 장기 주식보유 성향까지 더해지며 미국 자본시장의 수요 기반은 두꺼워집니다.
다만 이 구조가 언제나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주가 상승이 소수 대형 기술주에 집중되고, 주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자산 격차가 확대될수록 선순환은 불균형해질 수 있습니다. 미국 증시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국민의 광범위한 주식 보유이지만, 그 힘이 집중 리스크와 불평등을 함께 키우고 있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