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 조달’서 ‘위기 대비’ 공급망으로 전환
수입국·항로·계약·유종까지 동시에 다변화
자원안보기금 신설…위기 지나도 투자 지속
Chat GPT 생성 이미지7개월째 이어진 중동전쟁이 한국의 자원 조달 공식을 바꿔놓고 있다. 정부는 가격과 효율을 앞세워 필요한 자원을 제때 사오는 방식에서 벗어나 공급국과 운송로, 계약 방식, 비축까지 미리 분산해 위기가 닥쳐도 끊기지 않는 공급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중동산에 약 70%를 의존하는 원유부터 2035년까지 비중동산 비중을 50% 이상으로 높인다.산업통상부는 23일 김정관 장관 주재로 제6차 자원안보협의회를 열고 △제1차 자원안보기본계획 △제5차 석유비축계획 조정안 △핵심광물 지정계획 △제1차 핵심광물 비축계획 등 4개 안건을 심의·확정했다. 지난해 2월 국가자원안보 특별법 시행 후 처음 마련된 법정 기본계획으로 2026년부터 2035년까지 10년간의 자원안보 정책 방향을 담았다.
이번 계획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적기 공급(Just-in-Time)’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Just-in-Case)’로의 전환이다. 정부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실시한 자원안보 진단평가에서는 코로나19 이후 원유 수입국 수가 줄어드는 등 공급망 편향성이 심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차원에서도 경제성과 생산성을 우선해 원유를 도입해온 것으로 진단됐다. 2025년 기준 원유의 중동 의존도는 약 70%에 달했고 전체 수입 물량의 61%가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했다. 중동 산유국뿐 아니라 원유가 들어오는 하나의 해상 길목에까지 공급망이 집중돼 있었던 셈이다.
정부가 중동전쟁을 이번 기본계획의 직접적인 계기로 명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산업부는 전쟁 대응 과정에서 특정 지역과 운송로에 집중된 공급망이 민생과 산업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진단했다. 공급망의 성패 역시 단순히 자원을 얼마나 많이 확보했느냐보다 어느 나라와 항로에 병목이 형성돼 있는지를 관리하는 문제로 달라졌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35년 비중동산 원유 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린다. 현재 약 30% 수준에서 20%포인트가량 높이는 것으로 사실상 중동과 비중동의 비중을 절반씩 나누겠다는 목표다. 미주·유럽·아프리카산 원유 도입을 확대하고 운임 차액 지원과 다변화 실적에 따른 차등 지원,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 원유의 직접운송 확인 특례 등도 활용한다.
수입국만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과거 다변화 대책과 다른 대목이다. 위기가 발생할 때 현물시장에서 대체 원유를 급히 사오는 구조를 장기계약 중심으로 바꾸고 산유국 정부와 정부 간 협력도 활용한다. 원유 종류가 달라져도 국내 정유시설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정제설비 전환과 정제기술 연구개발(R&D)도 지원한다. 공급국을 바꾸면 운송 거리뿐 아니라 원유 성상 차이로 정유사의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는 만큼 조달부터 정제까지 함께 손보겠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이날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가격만 맞으면 자원을 가져오던 시대는 지났다”며 “예전에는 가격만 맞으면 가져올 수 있었지만 이제는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어떤 노선으로 가져오는지 하나하나까지 다 챙겨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원유도, 가스도, 광물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관리하면서 어떻게 안정적으로 확보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들여오는 길을 여러 갈래로 만드는 동시에 길이 막혔을 때 버틸 수 있는 시간도 늘린다. 정부는 2030년까지 2000만 배럴 규모의 석유 비축시설을 추가 확충한다. 2014~2025년 제4차 석유비축계획 이후 비축시설 증설이 없었던 만큼 사실상 10여 년 만에 저장능력 확충을 재개하는 것이다. 새 시설에는 정부 비축유뿐 아니라 산유국과의 국제공동비축 물량도 확보한다.
비축의 ‘양’뿐 아니라 ‘종류’도 바꾼다. 기존 연료유 중심의 비축에서 벗어나 비상시 나프타 생산에 활용할 수 있는 콘덴세이트도 확보한다. 중동발 공급 충격이 자동차 연료 부족에 그치지 않고 나프타를 원료로 쓰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생산 차질로 번질 가능성까지 대비하는 조치다.
가스도 특정국 쏠림을 낮춘다. 정부는 특정국 의존도를 30%대 미만으로 관리할 계획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액화천연가스(LNG) 수입량에서 카타르산 비중은 2016년 35.5%에서 지난해 14.9%로 낮아졌다. 반면 같은 기간 호주산 비중은 14.0%에서 31.4%로 높아졌다. 중동 의존도는 낮아졌지만 공급선이 다시 특정 국가에 집중되지 않도록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자원안보의 범위는 석유·가스를 넘어 반도체와 배터리 등 첨단산업 원료까지 넓어진다. 정부는 핵심광물을 38종에서 51종으로 확대하고 비축 품목도 24종에서 29종으로 늘린다. 공급망이 특히 취약한 광물은 목표 비축 기간을 기존 180일에서 최대 365일까지 늘린다. 공공 비축량뿐 아니라 기업 재고와 재자원화 원료까지 합쳐 실제 위기 때 국내 산업에 투입할 수 있는 물량을 파악하는 ‘국가총가용재고’ 개념도 처음 도입한다.
관건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비용이 드는 다변화 정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다. 비중동산 원유는 중동산보다 운송비가 더 들 수 있고 다른 유종을 처리하려면 정제설비 투자도 필요하다. 국제 정세가 안정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다시 경제성이 높은 기존 공급망으로 돌아갈 유인이 커질 수 있다. 정부가 이번 기본계획에서 자원안보기금 신설을 별도 과제로 못 박은 이유다. 정부는 관련 세입·세출을 재구성해 핵심광물 확보와 석유·광물 비축, R&D, 인력 양성 등 장기간 투자가 필요한 사업에 기금을 활용할 계획이다.
김 장관도 “전쟁이 나고 위기가 닥치면 자원안보가 중요하다고 하고 예산도 늘어나지만 전쟁이 끝나고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이게 굳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며 “단년도 예산 상황에 따라 자원 확보 정책이 흔들리지 않도록 재정적인 기반을 튼튼히 가져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