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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미 대신 해남미?…치폴레가 한국 1호점에 택한 쌀의 비밀

아시아 1호점 밥쌀, 해남 간척지서 자란 국산 장립종 ‘IPS’
연 200t 고정단가 계약…수율 62%·직불금 공백은 숙제

지난 9월 2일 서울 강남역 인근에 미국 멕시칸 음식 체인 ‘치폴레’가 아시아 1호점을 열었다. 치폴레는 취향에 맞게 재료를 골라 담는 커스텀 방식으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간판 메뉴가 ‘부리토 볼’이다. 큼직한 그릇에 고기와 채소를 얹기 전, 가장 먼저 넉넉하게 깔아 기본 바탕을 만드는 핵심 재료가 바로 밥이다. 그렇다면 이 밥에 쓰인 쌀은 어디서 왔을까. 미국? 태국? 답은 전남 해남이다.

 치폴레 한국 1호점 메뉴에는 국내산 IPS쌀이 들어간다.(빅바이트컴퍼니) 치폴레 한국 1호점 메뉴에는 국내산 IPS쌀이 들어간다.(빅바이트컴퍼니)해남군 산이면 간척지에서 자라는 인디카 계열 품종 ‘아이피에스(IPS)’가 그 주인공이다. 윤영식 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 대표(56)는 “그동안에는 저희가 ‘이거 괜찮으니까 먹어봐’라고 해왔는데, 이제 치폴레도 쓰는 쌀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산 장립종이 상업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미국 외식 체인이 역으로 입증해 준 셈이다.

세계 쌀의 90%는 ‘날리는 쌀’이다자, 기초부터 짚자. 쌀은 크게 둘로 나뉜다. 쌀알이 짧고 통통하며 밥을 지으면 찰진 단립종, 그리고 길쭉하고 밥알이 날리는 장립종이다. 전자를 자포니카, 후자를 인디카라고 부른다. 우리가 평생 먹어온 밥은 전부 자포니카다. 한국, 일본, 중국 일부만 이 쌀을 먹는다.

그런데 세계 쌀 유통량의 85~90%는 인디카다. 동남아, 인도, 아프리카가 주로 먹는 쌀이다. 흔히 ‘안남미’라 불리는 바로 그 쌀이다. 관점을 뒤집어 보면 한국 쌀은 세계 시장에서 주류가 아니라 특수 품목에 가깝다. 쌀을 수출하겠다면서 자포니카만 붙들고 있는 건, 전 세계 시장의 10%짜리 문만 두드리는 셈이다.

 인디카 계열 쌀을 국내에 들여와 한국형으로 개발에 성공한 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 인디카 계열 쌀을 국내에 들여와 한국형으로 개발에 성공한 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한국에서 장립종 재배가 시작된 건 2024년부터다. 출발점은 수출이 아니라 기후였다. 온난화로 아열대 작물 재배지가 북상하는 상황에서 ‘기후변화 적응 쌀’이 필요했고, 동시에 국내 체류 외국인 수요도 늘었다. 2006~2015년 필리핀 국제벼연구소에서 일한 진중현 세종대 스마트생명산업융합학과 교수는 “귀국해 농촌에 가보니 외국인 없이는 농업이 지속되기 어렵겠더라”며 “이분들에게 값싸고 좋은 장립종 쌀을 공급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침수 2주 버티는 벼, 연구비는 농민이 댔다IPS는 진 교수팀이 개량한 품종이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인디카 품종 ‘IR64’에 침수에 강한 유전자(Sub1)와 인산비료 흡수율을 높이는 유전자(Pup1)를 넣었다. 2015년 교배를 시작해 2020년 특허를 내고 2025년 품종 등록을 마쳤다.

품종 특성은 이렇다. 진 교수는 “홍수로 물에 잠기면 보통 벼는 사흘 만에 말라 죽는데 IPS는 2주 넘게 버틴다”며 “비료도 보통 벼의 절반만 줘도 충분하다”고 했다. 해수면 상승으로 간척지에 바닷물이 드는 해남 입장에선 맞춤형 품종인 셈이다. 실제로 산이면 논에서는 염분기 있는 땅에서 장립종을 키우는 실증 재배가 한창이다. 윤 대표는 “해남 일부가 바닷물에 잠겨도 우리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염해에 강한 품종을 연구진과 함께 개발 중이라고 설명했다.

 진 교수팀이 개발한 IPS(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 진 교수팀이 개발한 IPS(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주목할 대목은 연구비를 댄 쪽이다. 정부가 아니라 농민이었다. 윤 대표는 2021년 진 교수를 만나 “무슨 이런 벼가 다 있느냐”며 3년간 세종대팀에 연구비를 지원했다. 2023년 기술이전을 받아 7ha로 시작한 재배면적은 2024년 21ha, 올해 100ha로 늘었다. 올해는 시간당 2t을 처리하는 인디카 전용 도정 가공공장도 준공했다.

치폴레에서 연락이 온 건 올해 초다. 샘플을 미국 본사로 서너 차례 보내 품질 기준을 통과했다. 4000곳 넘는 매장을 운영하는 치폴레는 현지 식재료 우선 조달 원칙을 고수한다. 국내에서 장립종을 대량 공급할 수 있는 곳은 해남뿐이었고, 장립종 전용 도정시설을 갖춘 곳도 윤 대표 쪽이 유일했다. 공급 계약 물량은 연 200t, 고정단가 방식이다. 조합 전체 생산량의 절반 규모다.

수율 62%, 직불금 0원…판은 열렸는데 제도는 미비여기서 손익을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투입 비용은 자포니카와 같다. 문제는 수확량이다. 인디카는 10a당 430~530kg으로 자포니카(520kg 안팎)와 비슷하거나 다소 떨어진다. 수매가는 자포니카 수준이고, 판매가는 수입 밥쌀 공매가격(1kg 2800~3200원)에 맞춘다. 윤 대표는 “순소득은 자포니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아직 ‘돈이 더 되는 농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도정도 걸림돌이다. 낟알이 길쭉해 기존 도정 설비로 깎으면 쉽게 부러진다. 베트남에서 전용 도정기와 선별기를 들여오는 데 8억원이 들었다. 그런데도 도정 수율은 62%에 그친다. 자포니카(72%)보다 10%포인트 낮다. 100kg을 찧으면 10kg이 고스란히 허공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IPS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도정 수율 62%라는 벽을 넘어야 한다.(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 IPS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도정 수율 62%라는 벽을 넘어야 한다.(땅끝황토친환경 영농조합법인)제도 지원은 전무하다시피하다. 장립종은 공공비축미 수매 대상도 아니고 전략작물직불금 품목에도 빠져 있다. 받을 수 있는 건 기본형 공익직불금이 전부다. 자포니카를 짓던 농가가 장립종으로 전환하는 순간 손에 쥐는 지원금이 깎인다는 뜻이다. 농가 15곳이 시험 재배에 머무르고 법인이 직접 재배 위험을 떠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 규모는 어떨까. 국내 밥쌀용 인디카 시장은 연 4000t 안팎으로 협소하다. 가공용 쌀을 합치면 10만t을 웃돌지만 시장이 커지는 속도는 더 지켜봐야 한다. 돌파구는 수출이다. CJ제일제당이 2만t 이상을 목표로 수출길을 타진 중이다. 국내 수요만 감당하려 해도 1000ha, 수출 물량까지 맞추려면 6000ha 규모의 논이 필요하다. 현재 재배면적은 100ha 수준이다. 윤 대표는 “가공 밥을 수출하려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는 정책 지원이 뒷받침돼야 할 영역”이라고 짚었다.

쌀 재고는 쌓여가고 소비량은 매년 최저치를 갈아치운다. 그 와중에 전 세계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쌀에 우리는 첫걸음을 뗐다. 해남 들녘에서 펼쳐지는 실험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다음은 진중현 세종대 교수와 일문일답.

 새로운 한국형 품종을 개발한 진중현 세종대 교수(진중현 교수) 새로운 한국형 품종을 개발한 진중현 세종대 교수(진중현 교수)Q. IPS는 어떤 쌀인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인디카 품종 IR64에 침수 저항성 유전자와 인산 흡수 효율 유전자를 접목한 기후적응형 품종이다. 물에 잠겨도 2주를 버티고, 물이 빠져나가며 비료가 쓸려가도 흙 속에 남은 양분을 알뜰하게 빨아들인다. 본래 열대지역용으로 개발했으나 남서해안 기후가 아열대화되면서 우리 땅에도 꼭 필요한 품종이 됐다.

Q. 가장 큰 기술적 걸림돌은 무엇인가.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다. ha당 6~7t은 나와줘야 수지가 맞는데 아직 그 수준에 못 미친다. 이른 봄 새벽 기온이 낮아 싹이 제대로 트지 못하고, 저위도 작물이다 보니 중위도권에서는 이삭이 패는 시기도 늦어진다. 게다가 인디카는 자포니카보다 꽃이 많이 피어 낟알을 채워야 할 공간이 훨씬 넓다. 물과 비료를 어떻게 조절할지 재배 기술을 정립하는 작업이 품종 개발 못지않게 시급하다.

병해충 예방 노하우도 더 쌓아야 한다. IPS는 IR64 계열이어서 퉁그로바이러스에 약하다. 그래서 퉁그로에 강한 벼를 따로 개발해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고온 피해를 피하려면 재배력 자체를 바꿔야 해서 개화기를 단축한 인디카를 만들어 올해 등록했고, 간척지용 내염성 품종도 등록을 마쳤다. 도열병과 흰잎마름병은 내성 계통을 도입해 연구 중이다. 농촌진흥청 지원사업으로 10개 대학팀이 기후변화·병해충 협력 연구를 하고 있다. 지금은 재배 역사가 짧아 조용한 것이고, 한번 퍼지면 굉장히 빠를 것이다.

Q. 수입 인디카가 훨씬 싼데 경쟁력이 있나.

단순 가격 경쟁으로는 승산이 없다. 대신 IPS는 엄격한 친환경 인증을 통과한 국산 쌀이라는 확실한 신뢰가 있다. 치폴레가 이 쌀을 낙점한 것도 전담 조리사가 이 품종에 맞춰 조리법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 조리법은 일종의 지식재산권인 만큼 균일한 원료가 연중 안정적으로 들어와야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 품질 편차가 큰 수입산으로는 맞추기 어려운 조건이다.

Q. 국산 밀이나 콩 재배에도 이런 모델을 적용할 수 있나.

풀어야 할 숙제는 똑같다. 소비자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균일한 품질의 농산물을 연중 넉넉하게 공급해 줄 유통 플랫폼이 없다는 점이다. 기존 정부 연구개발은 품종 육성에만 매달려 왔는데, 이 순서를 뒤집어야 한다. 시장 분석과 마케팅, 수출 판로 개척 같은 최종 유통 단계에서부터 출발해 현장에 필요한 기술을 거꾸로 역산해 개발해야 한다. 아울러 자포니카 품종에만 치우친 획일적 가격 지지 방식도 손질해야 한다. 일반 쌀과 친환경 쌀, 기능성 프리미엄 쌀을 명확히 구분해 보상해 주는 체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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