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주택 시장 다운사이징 37% 육박
뉴욕 개발업자는 세대 쪼개기
“면적 포기하고 핵심 입지 지킨다”
집은 클수록 좋다는 전통적인 부동산 공식이 세계 주요 대도시에서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과거 ‘더 넓은 공간’을 추구하던 흐름이 ‘작더라도 좋은 입지의 감당 가능한 집’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장기간 누적된 집값 급등과 고금리 기조, 징벌적 세금에 막대한 유지비 부담까지 겹친 결과로 풀이된다.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같은 주요 거점 도시에서 집주인과 매수자, 개발업자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소형 주택을 택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23일(현지시각) 주요 매체 보도와 부동산 통계를 종합하면 세계 부동산 시장에선 주택 규모를 줄이는 ‘다운사이징(downsizing)’과 소형화 바람이 일고 있다. 런던에서는 기존 대형 주택 보유자들이 자산 현금화를 위해 큰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옮기는 흐름이 거세다. 파리에서 집을 사려는 매수자들은 지나치게 높은 평당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총 매입가격을 낮추는 차원에서 소형 아파트로 몰린다. 뉴욕은 극심한 주택 부족과 임대료 급등 속에서 개발업자들이 소형 임대주택 공급을 쏟아내는 실정이다.
9일 영국 런던 의회 밖에서 주택 위기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주택 운동가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런던에선 집에 묶인 자본을 꺼내기 위한 다운사이징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지난해 기준 런던 내 아파트(플랫)와 단독주택(하우스) 간 가격 격차는 1.9배로 벌어졌다. 영국 부동산 포털 라이트무브 분석에 따르면, 런던에서 방 5개짜리 주택을 팔고 방 3개짜리로 이사할 경우 평균 106만 파운드(약 19억 2500만원) 자금을 현금화할 수 있다. 부동산중개업체 햄프턴스는 지난해 상반기 영국에서 새로 주택을 산 매수자 가운데 37%는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옮겨가는 다운사이저(downsizer)가 차지했다. 특히 런던에선 이 비율이 절반에 가까운 47%를 기록했다.
런던에서는 주로 은퇴를 앞둔 노년층이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시절 샀던 큰 주택을 팔고 있다. 이들은 블룸버그에 징벌적 세금과 고금리, 치솟는 공과금 같은 막대한 기회 비용을 쓰지도 않는 빈 방에 묶어둘 이유가 사라졌다고 했다. 금융정보업체 머니팩츠에 따르면 영국 5년 고정 주택담보대출 평균 금리는 3월 초 연 4.94%에서 최근 연 5.91%로 1%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여기에 더해 영국 정부는 2028년부터 고가주택 추가세(High Value Council Tax Surcharge)를 매길 예정이다. 영국 더타임스는 이달 중순 정부가 부과 기준을 기존 200만 파운드(약 36억 3200만원)에서 150만 파운드(약 27억 2400만원)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오래된 영국식 대형 주택에 들어가는 막대한 유지비도 상당한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영국에서 1~2인 가구 기준 월평균 에너지 요금은 98파운드(약 17만 8000원)지만, 4~5인 가구는 194파운드(약 35만 2000원)로 두 배에 달한다. 자산 배분 차원에서도 주거 비용과 부동산 비중을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금융적 논리가 강해졌다.
파리는 자산 현금화보다는 ‘감당 가능한 총액’에 초점을 맞췄다. 파리 공증인협회에 따르면 올해 파리 시내 아파트 평균 가격은 1제곱미터당 9520유로(약 1482만원)에 달한다. 전년 대비 0.1% 상승하면서 가격 상승세는 정체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절대적인 면적 당 단가가 높아 매수자들이 예산에 맞춰 면적을 줄이고 있다.
현지 부동산 플랫폼 피에이피(PAP) 조사 결과, 파리 내 인기 매물 상위 100개 중 69%가 우리나라 원룸에 해당하는 스튜디오나 거실에 침실 하나가 딸린 소형 주택이었다. 지난 몇년간 평당 단가가 급격히 뛰자 총액이 낮은 소형 매물에 수요가 집중됐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특히 프랑스는 대출 원리금 상환액이 소득 대비 35%를 넘지 못하게 법으로 막고 있어, 매수자들이 대출 한도 제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강했다.
뉴욕에선 극심한 주택 부족과 임대료 폭등이 개발업자들의 소형화 공급을 부추겼다. 부동산 매물 검색 플랫폼 스트리트이지 통계를 보면 지난달 뉴욕시 주택 매매 호가 중간값은 98만 달러(약 13억 3100만원)로 1년 새 2.0% 내렸다. 반면 같은 기간 중간 임대료는 월 4200달러(약 570만원)로 사상 최고치를 유지했다. 비싼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줄면서 집값도 내려 갔지만, 빌려서 라도 살려는 사람이 늘면서 월세가 뛰는 구조다. 스트리트이지는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높아지면서 집을 사려던 사람들이 매수를 미뤘다”며 “이들이 세입자로 남으면서 월세가 올랐다”고 했다.
그나마 빌릴 집을 찾기도 어렵다. 뉴욕시 공식 조사 결과 임대 공실률은 2023년 1.41%에 불과해 2021년 4.54%에서 급락했다. 임대주택 100채 중 빈집은 1~2채에 그친다. 전문가들은 까다로운 용도지역 규제와 긴 인허가 절차, 높은 건설비가 새 임대주택 공급을 막고 있다고 했다.
뉴욕 개발업자들은 한 가구당 면적을 줄이고, 전체 세대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월세난에 대응하고 있다. 미국 부동산 전문매체 더리얼딜은 같은 면적이면 600제곱피트(약 56㎡)짜리 125채가 750제곱피트(약 70㎡)짜리 100채보다 임대료를 더 많이 걷는다고 분석했다. 2025년 뉴욕시에 공급된 신축 임대주택 가운데 61.4%는 방 한 칸 짜리 스튜디오나 침실 1개가 딸린 소형 주택이었다. 특히 전 세계에서 주거비가 가장 높은 지역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히는 맨해튼은 이 비중이 72.1%까지 치솟았다. 높은 임대료 탓에 어쩔 수 없이 시장이 소형 주택 위주로 적응하는 모양새다.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는 외곽 넓은 집 대신 도심 핵심 입지 소형 아파트를 쥐는 이른바 ‘똘똘한 한 채’ 선호 현상이 이미 익숙하다. 도쿄 23구 신축 맨션은 2025년 평균 가격이 1억 3613만엔(약 11억 7500만원)으로 1년 새 21.8%나 폭등했지만, 평균 전용 면적은 오히려 1.3% 줄었다. 집값이 급등하는 현상을 일정 부분 막기 위해 건설사들이 면적을 잘라낸 결과다. 서울 역시 올해 1분기 아파트 거래 가운데 44%가 전용 60㎡(약 18평) 이하 소형에 집중됐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전문가를 인용해 과거 아시아 초고밀도 도시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면적 축소와 입지 우선 전략이 이제 서구 대도시에서도 경제적 합리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 부동산 전문기업 잭슨-스톱스는 “대도시 주택 소비 단위가 ‘얼마나 넓은가’에서 ‘감당 가능한 총액으로 좋은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는가’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