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이 없다. 가수 장사익을 만나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다. 그의 인사는 늘 단순하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두 마디가 전부다. 그런데 장사익이 말하면 평범한 인사말도 노래가 되고 시가 된다. 자신을 내세우지도,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꾸미지도 않는다. 사람을 만나면 고맙다고 하고, 함께한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한다.
그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도 마치 한 소절의 노래처럼 보인다. 그 안에는 살아온 시간과 무대에서 흘린 땀, 좌절과 다시 일어섰던 순간,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던 수많은 기억이 새겨져 있는 듯하다.
걸음에도 장사익만의 리듬이 있다. 사람 앞에 멈춰 서는 모습에도 호흡이 있고, 노래 사이사이 던지는 추임새에도 삶의 흥과 한이 배어 있다. 그의 대표곡 <찔레꽃>처럼 장사익도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다. 담장 위에 숨어 핀 찔레꽃처럼 소박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래 남는 향기를 품고 있다.
그가 늦은 나이에 노래를 시작해 자신의 길을 걸어온 시간도 그렇다. 서두르지 않았고, 자신을 꾸미지도 않았다. 살아온 만큼 노래했고, 자신의 삶을 목소리에 담았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노래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노래가 우리에게 오래 남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의 시간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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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장 위에 조용히 핀 찔레꽃처럼, 소박하지만 오래 남는 향기를 품은 장사익.” |
| ⓒ 장사익 |
첫 만남, 그리고 '찔레꽃'
필자와 처음 만난 장사익은 노래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작고 허름한 차림의 그가 내게 건넨 첫마디도 뜻밖이었다.
"녹화는 하되 방송은 빼주세요."
199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만 해도 TV에 한 번이라도 더 나오기 위해 방송국 문을 두드리는 가수들이 많았다. 그런데 방송을 빼달라는 사람이라니. 나도 모르게 '노래를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궁금증은 남았다. 그날은 KBS국악관현악단 초청 연주회였다. 유열을 비롯해 국악과 어울리는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고, 장사익도 협연자로 참여했다. 나는 중계차에서 공연 연출을 맡고 있었다. 장사익의 차례가 됐다.
"찔레꽃…."
첫소리가 길게 뻗어 나왔다.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노래라기보다 온몸으로 소리를 밀어내는 듯했다. 나비처럼 이어지는 몸짓도 내가 알던 가수들과 달랐다. 이어 <님은 먼 곳에> <국밥집에서>가 무대를 채웠다. 그제야 생각이 달라졌다. 이 사람의 노래를 녹화만 해놓고 묻어둘 수는 없었다. 노래가 이어질수록 객석의 반응도 뜨거워졌다. 녹화가 끝나자마자 그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한 곡만 방송에 내보내겠습니다. <찔레꽃>입니다."
장사익은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객석의 뜨거운 반응을 설명하며 방송 출연을 거듭 설득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한 곡만 방송해 달라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그렇게 장사익의 노래가 TV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해졌다. 이후 초청음악회와 산사음악회, 단독공연 등을 통해 다시 만나는 기회가 이어졌다.
장사익의 첫 방송 출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방송을 망설였던 소리꾼과 그의 노래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연출자의 만남이었다. 그날 방송된 곡은 <찔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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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동계올림픽 초정연주회에 앞서 필자와 함께한 장사익 |
| ⓒ 진재중 |
국악도 가요도 아닌, 장사익의 소리
장사익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필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장르의 가수인가?'
민요의 소리가 느껴지다가도 판소리의 힘이 실리고, 어느 순간에는 재즈처럼 자유롭게 흐른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음악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장사익은 자신의 음악을 '무정의'라고 표현한다. 어느 한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음악, 결국 장사익만의 소리라는 뜻이다.
"내 노래를 꼭 어느 장르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냥 내가 살아오면서 느끼고 겪었던 것들을 내 방식대로 소리 내는 겁니다."
그의 음악에는 그가 살아온 시간이 들어 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 장구를 치며 흥을 돋우던 아버지의 모습, 뒷산에 올라 목청을 가다듬던 소년, 군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청년, 직장을 전전하며 가수의 꿈을 놓지 않았던 중년의 시간이 한 사람의 목소리 안에 녹아 있다.
"제 노래는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힘들었던 일들, 기뻤던 순간들이 다 지금의 제 목소리를 만든 것 같아요."
그래서 장사익의 노래를 듣다 보면 단순히 '노래를 잘한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것은 노래 이전에 사람의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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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한 장르에도 머물지 않는 음악, 장사익만의 소리로 남았다.” |
| ⓒ 장사익 |
목청 좋은 소년, 그러나 늦게 핀 꿈
장사익은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잘했던 아이는 아니었다. 노래를 시키면 감정을 담기보다 책을 읽듯 불렀다. 오히려 잘했던 것은 웅변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매일 아침 뒷산에 올라 목청을 돋웠고, 그 습관은 중학교 3학년까지 이어졌다. 상고 졸업 후에는 생계를 위해 열댓 개의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꿈은 놓지 않았다. 음악학원을 다니고 국악판을 찾아다니며 태평소를 배웠고, 주말이면 서울놀이마당에서 우리 가락을 들었다.
전주대사습놀이와 KBS국악경연대회에서 이름을 알렸지만 대중에게는 여전히 낯선 가수였다. 음악을 시작한 시기는 남들보다 늦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 세월은 결코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여러 직업을 거치며 만난 사람들, 생계를 위해 견뎌온 시간, 아버지의 장구 소리와 어린 시절 산에서 목청을 돋우던 기억까지 그의 삶은 고스란히 음악의 밑바탕이 됐다.
"돌아보면 다 노래 공부였던 것 같아요. 그 세월이 없었으면 지금의 노래도 없었을 겁니다."
장사익의 노래에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다. 젊은 날의 방황과 생활의 고단함,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온 세월이 그의 목소리에 쌓였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살아온 삶이 어느 순간 노래가 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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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태평소 불던 시절의 장사익 |
| ⓒ 장사익 |
마흔다섯, 드디어 무대에 서다
장사익은 1994년 홍대 앞 작은 소극장에서 첫 무대에 섰다. 마흔다섯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가수로서 전성기를 지나갈 나이였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음악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이 첫 무대는 단순한 데뷔 무대가 아니었다.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을 비로소 노래로 풀어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2년 뒤인 1996년에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공연을 열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혀갔다. 무대에 서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어떤 노래를 해야 할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는 결국 답을 자신의 삶에서 찾았다.
"내가 살아온 게 있는데 굳이 남의 노래를 똑같이 부를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내 안에 있는 걸 그냥 꺼내보자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노래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때로는 늦추거나 앞질렀으며, 음과 음 사이에도 여백을 두었다. 목소리 역시 억지로 다듬지 않았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과 살아온 시간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슬픔도 내 것이고, 기쁨도 내 것이잖아요. 살아온 세월이 다 내 안에 있는데 그것을 빼놓고 노래할 수는 없죠."
한과 흥, 외로움과 기쁨,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목소리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졌다. 그렇게 첫 무대에서 시작된 '자신의 삶을 노래하는 방식'은 이후 장사익만의 독특한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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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을 바꾸기보다 자신의 삶을 노래하며, 마침내 자신만의 소리를 찾은 장사익.” |
| ⓒ 장사익 |
2천 명을 침묵시킨 한 곡
장사익의 공연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곡이 <하늘 가는 길>이다. 임동창의 피아노 전주와 함께 시작된 11분 남짓한 노래가 이어지자, 처음에는 움직이던 객석이 점차 조용해졌다. 3분, 5분이 지나면서 2천 명 가까운 관객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그의 노래에 집중했다. 11분의 노래가 끝난 뒤에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객석에서 큰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장사익에게 그 침묵은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 순간이었다.
"노래는 사람 마음에 닿아야 해요. 내가 소리를 내고, 그걸 듣는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노래가 완성되는 것 같아요."
<하늘 가는 길>은 장사익 공연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화려한 무대 장치보다 오롯이 목소리로 객석을 붙잡고, 자신의 삶에서 나온 소리로 관객과 마음을 나누는 것. 그것이 장사익이 만들어온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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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는 마음에 닿아야 노래가 된다.” 장사익이 말하는 노래의 의미. |
| ⓒ 장사익 |
"시련과 극복"을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장사익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시련과 극복'이라는 말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더 눈에 띄는 것은 극적인 극복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놓지 않았던 태도다. 그에게도 노래를 멈춰야 할 만큼 힘든 시간이 있었다. 몇 년 동안 목에 문제가 생겨 마음대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평생 자신의 목소리로 무대에 섰던 그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처음에는 답답했죠. 노래를 해야 하는데 마음대로 소리가 안 나오니까요. 그렇다고 화를 낸다고 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받아들였어요."
마흔다섯에 첫 무대에 오른 것도, 여러 직업을 거치며 자신의 길을 찾은 것도 남들보다 늦었다. 그러나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특별히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하고 싶은 걸 오래 했을 뿐이에요. 노래가 좋으니까 계속한 거죠."
장사익의 삶에는 극적인 성공 공식도, 특별한 비결도 없다.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의 길을 놓지 않고 한 걸음씩 걸어온 시간뿐이다. 그의 삶을 설명하는 말은 어쩌면 '은근과 끈기'에 더 가깝다. 그의 노래가 오래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것도 그 목소리 안에 노래뿐 아니라, 시련을 견디며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온 시간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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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사익의 목소리에는 노래를 넘어,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살아낸 한 사람의 시간이 담겨 있다.” |
| ⓒ 장사익 |
늦게 피어 더 오래 남는 꽃
장사익은 자신의 삶을 꽃에 비유한다.
"서둘러 핀 꽃은 서둘러 사라진다."
그는 마흔다섯에 처음 무대에 올랐다. 환갑을 앞두고 마라톤을 시작했고, 일흔에는 독학으로 익힌 한글 서예로 전시회도 열었다. 남들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니, 아무튼 시작하는 용기를 내며 산다."
그에게 꽃이 피는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언제 피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계절이 왔을 때 꽃을 피우는 일이었다. 여러 직업을 거치며 만난 사람들, 견뎌온 시간과 삶의 굴곡은 오랜 시간이 지나 그의 노래 속에서 깊이로 피어났다. 그는 젊은 음악인들의 도전도 응원한다.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대로 자기 시대의 노래를 하는 거죠. 그들의 노래가 있어야 또 다음 세대의 노래가 나옵니다."
봄에는 봄꽃이 피고 가을에는 가을꽃이 피듯 사람마다 피어나는 때가 다르다. 젊은 음악인들이 봄의 싱그러움을 노래한다면, 장사익은 살아온 세월이 빚어낸 깊이를 노래한다. 그래서 그의 꽃은 늦게 핀 꽃이지만 결코 늦은 꽃은 아니다. 자신의 계절을 기다렸다가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피어난 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이 계속되는 한, 아직 피울 꽃이 남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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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계절은 온다. 오늘도 새로운 시작을 이어가는 장사익.” |
| ⓒ 장사익 |
한 사람을 위해 부른 노래
2022년 정월대보름 무렵, 장사익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어령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장사익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장사익은 곧바로 카세트와 반주 CD를 챙겨 평창동 자택으로 향했다. 그날 그가 부른 첫 곡은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이어 <뜨거운 침묵> <산 너머 언덕 너머>를 불렀다.
며칠 뒤 이어령 선생은 한 기자에게 장사익의 노래를 들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장사익 노래를 나 혼자 들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령 선생의 부고가 전해졌다. 장사익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분이 내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셨으니, 내가 가서 불러드리는 게 당연했어요. 노래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게 참 고마운 일이죠."
그날에는 공연장이 없었다. 관객도 박수도 없었다. 한 사람이 듣고 싶어 한 노래를 위해 가수가 직접 찾아가 노래를 불렀다. 장사익의 노래가 한 사람의 마지막 시간과 마주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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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수도 관객도 없었다. 한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위해 장사익이 직접 찾아가 노래를 불렀다.” |
| ⓒ 장사익 |
숨은 꽃에서 만난 자신의 삶
장사익의 대표곡 <찔레꽃>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던 시절, 어느 날 집을 나서다 담벼락과 아파트 화단 주변에서 낯선 향기를 맡았다. 처음에는 장미꽃에서 나는 향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미 덩굴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하얀 찔레꽃이 숨어 피어 있었다. 화려한 꽃 뒤에 가려져 있지만 은은하고 깊은 향기를 내는 찔레꽃. 장사익은 그 모습을 자신의 처지와 겹쳐 보았다.
"처음에는 장미 덩굴에서 나는 향기인 줄 알았어요. 찾아보니 덩굴에 숨어 있던 하얀 찔레꽃에서 나는 향기였죠. 더 내려갈 수 없는 현실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저를 그 향기가 달래준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어요."
그날의 경험은 노래로 이어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추스르며 <찔레꽃>의 가사를 쓰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랫동안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던 그에게 찔레꽃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힘을 건넨 계기가 됐다. 장사익은 찔레꽃을 이렇게 설명한다.
"찔레꽃은 화려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가까이 가면 향기가 참 좋아요. 나도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늦었고 내세울 것도 별로 없었지만, 내 안에 있는 소리는 버리지 않았어요."
그에게 찔레꽃은 화려함보다 소박함, 드러남보다 숨은 존재의 가치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래서 <찔레꽃>은 장사익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전, 오랜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됐다. 훗날 이 노래는 그의 대표곡이 됐다. 그리고 한때 담벼락 아래 숨어 피어 있던 작은 꽃은 장사익의 삶과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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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은 듯 피어난 찔레꽃처럼, 늦게 피어난 장사익의 음악도 오래 남았다.” |
| ⓒ 진재중 |
처음 마음으로
젊은 시절 장사익의 소리는 천둥처럼 터졌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안으로 향한다. 힘으로 밀어붙이기보다 깊은 울림으로 사람의 마음에 다가간다. 그가 말하는 '늦되어도 늦은 게 아니다'라는 말은 성공의 시기가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의 계절이 있다는 뜻에 가깝다. 장사익은 지금도 삶의 끝까지 노래하고 싶다고 말한다. 젊은 날의 폭발적인 소리에서 이제는 세월을 견딘 사람의 깊은 소리로 변해가고 있다.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저는 녹화는 하되 방송은 빼주세요."
그때는 의아했던 그 말이 이제는 장사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는 방송이나 인기를 좇지 않았다. 자신의 소리를 좇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닿았다. <찔레꽃>처럼 그의 노래는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그가 부르는 것은 노래만이 아니다. 늦게 시작한 사람의 시간, 견뎌온 삶, 아직 포기하지 않은 꿈이다. 꽃은 저마다 피는 때가 다르다. 장사익의 꽃은 조금 늦게 피었다. 대신 오래 향기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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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이나 인기를 좇기보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장사익. |
| ⓒ 장사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