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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순시를 위해 공항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 부부. 1951.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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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문제와 관련해 이승만 정권은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그 후의 역대 정권들은 대규모 주택 건설이나 부동산 세제 개정 혹은 금융기관 대출 규제 등을 통해 부동산 소유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 정권은 시장에 대량 공급할 수 있는 부동산을 보유했다. 그래서 굳이 위와 같은 방식들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은행 조사부가 1948년에 발간한 <조선경제연보>에 따르면, 1945년 말의 남한 경지 면적은 약 232만 정보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의 '농지개혁사업' 코너를 보면, 귀속재산(일본인 재산) 관리기관인 신한공사가 1948년에 관리한 귀속 농지는 26만 7776정보다. 그중 74.3%는 미 군정하에서 매각됐다. 6만 8747정보에 해당하는 나머지 농지는 대한민국으로 이관됐다.
이처럼 귀속 농지의 경우에는 미군정이 처분한 것이 4분의 3이고 대한민국에 이관된 것이 4분의 1이다. 반면, 여타의 귀속 부동산과 관련해서는 정반대 양상이 나타났다. 한국개발연구원이 발간한 <한국경제의 성장과 정부의 역할>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28만 8394건의 주택·대지·점포 중에서 미군정이 처분한 것은 0.3%였다. 나머지는 이승만 정권으로 이관됐다.
이승만 정부에 이관된 귀속 농지 6만 8747정보는 약 682제곱킬로미터다. 서울시(약 605제곱킬로미터)보다 넓은 면적이다. 귀속 부동산 99.7%에 더해 귀속 농지 약 682제곱미터를 관리했으니, 이승만 정권이 부동산 공급 물량을 얼마나 많이 쥐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 운신의 폭이 넓은 상태에서 이승만 정권은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1950년 4월 6일 시작돼 1950년대 후반에 마무리된 이 사업은 소작농을 줄이고 자영농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간한 <농지개혁사 연구>에 따르면, 해방 당시 28만 5천 호였던 자작농은 1951년에 176만 3천 호가 됐다. 증가분인 147만 8천 호의 전부가 농지개혁 때문에 자작농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중 일부가 농지개혁에 힘입어 자작농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토지개혁이 대세
제2차 대전 직후의 세계적 대세는 토지개혁이었다. 이것은 유럽과 동양의 유행이었다. 1947년 4월 3일 자 <경향신문>은 "구라파 급(及) 동양제국(諸國)에 있어 일종의 유행"이라고 말한다.
그런 속에서 한국 농민들이 희망한 것은 무상몰수·무상분배였다. 그해 2월 22일 자 <독립신보>에 따르면, 전날 끝난 전국농민총연맹 전국대회의 결의사항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권은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을 채택한 데 이어, 그나마 그것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문중·대학·사찰 토지를 제외시켜 대지주들이 대학에 재산을 감추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소작 금지의 예외를 인정해 농지 임대차 형식으로 소작이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적지 않은 소작농이 농지개혁에 힘입어 자작농이 된 것은 분명한 성과다. 이승만 정권이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 운신의 폭이 넓었고 세계적으로 토지개혁이 대세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승만과 비슷한 시기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도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사후에까지 추앙을 받는다. 그들이 만든 정치체제가 견고하기 때문인 측면도 있지만, 그들이 해놓은 토지개혁이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북한 헌법에 김일성의 이름이 나오는 것처럼, 중국 헌법에는 마오쩌둥의 이름이 나온다. 이 헌법 서문은 마오쩌둥의 주도하에 1949년에 건국이 이뤄진 일을 지적하면서 "이때부터 중국 인민은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마오쩌둥과의 인연을 이처럼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그의 토지개혁으로 이익을 얻은 세력이 그 뒤 중국을 계속 주도한 것과 관련을 갖는다.
이승만이 실시한 귀속 부동산 분배와 농지개혁의 수혜자들은 적지 않았다. 귀속 부동산을 분배받은 기업인 중에는 재벌로 성장한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 헌법 내에서 대우를 받지 못한다. 현행 헌법 전문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게승하고"라고 함으로써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불의'와 등치시킬 뿐이다.
헌법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이승만에게 고마워하는 정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을 억압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극우세력이 그를 이용해 세력화를 도모하는 현상만 존재할 따름이다. 농지개혁에서 성과를 냈는데도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부정선거를 하고 불법 개헌을 하고 친일 청산을 훼방하고 민간인을 학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동산 정책 자체에도 그 원인이 있다.
토지나 건물은 단순한 재산에 그치지 않고 사회체제와도 연관된다. 부동산은 제도와 권력을 낳는 토대다. 그렇기 때문에 부동산 개혁은 부동산 하나만을 다루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전반적인 사회개혁이 동반돼야 부동산 개혁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사회체제와 연관된 것이기에 부동산 개혁은 갈등과 대립을 유발한다. 이 개혁으로 권리를 획득한 사회적 약자가 그것을 계속 지키려면 전반적인 법과 제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법과 제도가 부동산 개혁 이전의 사회질서에 맞춰져 있다면, 저항 세력이 그 사회질서를 활용해 반대 여론을 일으키고 개혁을 훼방하기도 쉬워진다.
이승만의 잘못된 방식
부동산 문제에 대한 저항 세력의 목소리가 특히 큰 것은 그들이 기존 시스템과 이념을 최대한 활용해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동산만 건드리고 나머지 사회체제는 그냥 두는 형태의 부동산 개혁은 승산이 높지 않다.
체제의 타당성 여하를 떠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자기들이 실시한 토지개혁에 어울리는 사회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토지개혁의 수혜자들은 그 토지개혁과 어울리는 체제 속에서 안전하게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손실을 본 세력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법과 제도와 언론이 토지개혁과 어울리는 쪽으로 탈바꿈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부동산 개혁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에 대한 지지가 사후에도 이어지는 데는 이런 요인도 존재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사회주의 개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농지개혁을 뒷받침하는 이념은 당시의 사회체제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승만 체제하의 대한민국은 평등과 공정성을 지향하는 농지개혁의 이념과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제국주의적 수탈·착취에 익숙한 친일 세력이 주도하는 나라였다.
이승만은 세계 대세에 밀려 농지개혁을 추진하면서도 농지개혁에 어울리는 사회체제를 만드는 일을 무시했다. 도리어 그는 농지개혁의 이념과 정반대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 자신부터가 이러했으니 농지개혁의 생명력이 항구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은 부동산 개혁을 추진할 물적 자원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 개혁에 대한 마인드가 취약했다. 그는 대중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데 익숙한 친일파들에게 어울리는 사회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농지개혁을 마지못해 수행했다.
1945년 당시의 소작지 비율은 전체 농지의 50%대였다. 이 비율은 농지개혁 초기인 1951년에 8.1%로 떨어졌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이 수치가 20%대에 근접했다. 1990년대에는 40%를 뛰어넘었고 2015년에는 50%를 넘었다.
농지개혁의 원칙은 경자유전이다. 소작농에게 자기 땅을 만들어주는 것이 이 개혁의 대의다. 그런데 농지개혁이 끝난 직후인 1960년대부터 소작지 비율이 높아졌다. 한국의 농지개혁이 이처럼 실패한 것은 농지개혁과 사회개혁을 동시에 진행하지 않은 이승만의 잘못된 방식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