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사극 <스캔들>은 남편의 축첩에 대한 부인의 반응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조씨 부인(손예진 분)은 남편인 유 대감(도지훈 분)이 소옥(신윤하 분)이라는 어린 첩을 들인 것에 분노하고 불안해한다.
하지만, 조씨는 감정을 감춘다. 대신, 반격을 꿈꾼다. 그의 아이디어는 썸타는 관계인 사촌동생 조원(지창욱 분)을 이용하는 것이다. 조원이 소옥을 유혹해 조원의 아이를 임신하게 만드는 것이 조씨의 복수 계획이다.
그럴 생각으로 조씨가 사촌동생을 불러들이지만, 그 동생은 엉뚱하게도 조씨 부인의 지인인 청상과부 희연(나나 분)에게 반한다. 남편의 축첩에 대한 사대부 부인의 대응이 엉뚱한 상황 전개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조선은 일부일처제 국가인데... 왜 '첩'이 존재했나
조선시대 사람들의 부부관계는 기독교 국가에서 온 이방인의 눈에 인상적으로 비쳤다. 스물세 살 때인 1653년에 나가사키로 가려다가 제주도에 표착한 뒤부터 1666년에 조선 본토를 탈출할 때까지 13년간 '코레왕국'을 경험한 헨드릭 하멜의 글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멜 표류기>의 일부인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남자는 아내가 이미 몇 명의 자식을 낳은 뒤라 해도 내보내고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법이 허용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남자는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다."
축첩의 주된 피해자인 상류층 여성들은 공개적 혹은 법적으로 맞서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의 대응은 <경국대전>과 더불어 법전 기능을 수행한 <대명률직해>의 '투기'에 해당될 소지가 있었다.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한 <대명률직해>의 호율(戶律) 편은 "비록 칠출(七出)을 범했지만 삼불거(三不去)에 해당하는데도 출송(黜送)한 것"을 처벌 대상으로 규율했다. 투기나 질투 등을 금지하는 칠거지악을 저질렀지만 부인을 내쫓을 수 없는 세 가지 사정이 있는데도 부인을 쫓아내는 행위를 처벌 대상에 넣은 것이다.
위 조문은 부인에게 돌아갈 친정이 없거나 부인이 시부모 삼년상을 치렀거나 가난을 함께 겪은 조강지처인 경우에는 칠거지악 사유가 발생했더라도 부인과 이혼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칠거지악이 이혼 사유임을 전제하는 조문이었다.
조선은 일부일처제 국가였다. 또 첩의 자녀인 서얼을 집요하게 차별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부인이 남편의 축첩에 항의하는 것 자체는 위법행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항의는 남편이 왜곡하기에 따라서는 투기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축첩하는 남편들은 칠거지악을 무기로 아내의 항의에 대해 법적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조선은 일부일처와 서얼 차별을 당연시하면서도 축첩 문제에서만큼은 예외를 뒀다. 이런 예외를 가능케 하는 칠거지악죄가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은 울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여성 중 하나가 호남지역 사림파인 유희춘을 남편으로 둔 덕봉 송종개(1521~1578) 시인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은 1567년의 선조 즉위를 기점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로 대별된다. 15세기 후반부터 탄압을 받은 사림파(유림파)는 16세기 중후반인 이때에 이르러 영구 집권에 성공했다. 이들의 후예가 1910년 멸망 때까지 조선을 이끌었다. 훈구파가 일반적으로 대지주이고 사림파가 일반적으로 중소 지주였다는 점은 1567년의 정권교체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시사한다.
1536년경에 8세 연하인 송종개와 결혼하고 25세 때인 1538년에 과거시험 대과를 통과한 유희춘은 1547년부터 유배 생활을 했다. 그의 유배는 제자인 선조가 임금이 될 때까지 이어진다. 송종개는 그 20년의 유배 기간 동안에 집안을 건사했을 뿐 아니라 시어머니상도 치러냈다.
그처럼 희생했는데도 남편 유희춘은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유배지에서 그렇게 했다. 유희춘은 부인이 자기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시어머니를 위한 삼년상을 마친 송종개가 거주지인 전라도 담양에서 남편의 유배지인 함경도 종성을 찾아갈 때 지은 시가 있다.
남편의 첩을 잡으러 간 송종개
유희춘 문집인 <미암집>에 '마천령에서 읊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시는 "가고 또 가서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는 끊임없이 거울처럼 평평하네/ 부인이 만리 끝을 무슨 일로 왔는고/ 삼종(三從)도리 무겁고 한 몸은 가볍구"라는 시구를 담고 있다.
오늘날의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가르는 마천령에서 지은 이 시는 송종개가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 사후에는 아들을 따른다'는 삼종지의(三從之義)를 실천하고자 그 먼 길을 여행한 것 같은 인상을 줄 소지가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그런 여행이 아니었다. 이것은 누군가를 잡으러 가는 여행이었다. <고문서연구> 2003년 제23권에 실린 역사학자 이성임의 논문 '16세기 양반 관료의 외정(外情) -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부인 송씨는 자신이 남편의 배소인 종성에 찾아가는 이유를 '삼종의 도리 무겁고 자신의 한 몸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지만, 본래의 의도는 유희춘과 첩 무자(戊子)를 갈라놓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유희춘은 배소 종성에서 15세 연하인 무자를 작첩(作妾)하여 생활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스캔들>의 조씨 부인은 남편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첩실인 소옥을 곤란케 만들 작전을 꾸민다. 이에 비해 송종개는 불만을 숨기지 않고 남편의 첩을 잡고자 한반도 서남부에서 동북부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는 가는 도중에 시도 썼다. 이동하는 동안의 그 마음은 좋지 않았겠지만, 시를 쓰면서 첩을 잡으러 가는 그 여행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송종개는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남편의 유배가 풀린 뒤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그의 남편은 어디를 가든 제2, 제3의 무자를 만들어낼 남자였다. 유희춘이 종성에서 돌아온 뒤인 1571년에 58세 나이로 전라도관찰사가 됐을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위 논문의 설명이다.
"유희춘이 전라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부인 송씨는 무엇보다도 남편이 여러 관기를 접하게 될 것이 가장 염려되었다. 그녀는 이후에 전개될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편과 이별하는 자리에서 정욕을 억제할 것을 종용했다. 그것이 기운을 보존하는 데 좋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환갑 3년 전에 '정욕을 억제하라'는 충고를 받은 유희춘은 부임지에서 한동안은 조심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경아'의 존재가 송종개에게 들려왔다. 전주기생 옥경아가 관찰사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송종개는 사직하고 귀가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유희춘은 걱정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유희춘처럼 축첩으로 인해 부인의 속을 썩인 사대부들은 임금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하늘'도 공식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따르지만 실상은 후궁제를 통해 축첩을 했다. 그런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사대부들이 축첩을 꺼려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일반 지주들의 축첩은 몰라도 사대부들의 축첩은 왕실의 후궁제에 의해 정당화되는 측면이 있었다. 임금이 공공연히 후궁을 들였기 때문에 사대부들의 축첩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큰 힘을 받기 어려웠다. 상류층 남성들의 축첩은 그들의 '정욕'뿐 아니라 후궁제도에도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송종개는 남편의 축첩을 제지할 생각에서 '정욕을 억제하라'고 충고했다. 사실, 이 충고는 임금에게 해야 했다. 임금 자신이 축첩을 피하고 이를 엄히 금했다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자세도 어느 정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스캔들 축첩 송종개 유희춘 후궁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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