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달하고 능청맞은 드라마 속의 황대식은 전두환을 연상시킨다. 백기태는 대통령 피살사건에 대한 수사권을 이용해 국정 전반을 주무르는 황대식을 없앨 목적으로 황대식의 연회장에 폭발물을 설치한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 작업에 동원된다.
제4회 후반부와 제5회 초반에 묘사된 이 연회는 백기태의 의도와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보안사령부 중령인 동생 백기현(우도환 분)이 그곳에 참석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다. 당황한 백기태는 연회장에 불쑥 들어가 불청객 행세를 하면서 폭발을 막고자 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도, 또 한편으로는 불행스럽게도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그러나 백기태는 포기하지 않는다. 황대식을 없애기 위한 또 다른 공격에 착수한다. 이번에는 폭발물 공격과 더불어 저격수들까지 동원한다. 하지만, 계획이 사전에 누설돼, 황대식이 짜장면을 먹으며 상황 보고를 받는 상황(제6회 앞부분)이 연출된다. 상대방이 음식을 씹으며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 백기태의 작전은 허망하게 무산된다.
전두환 향한 국가기관 내부의 반발심 상당
전두환에 대한 1979년 당시 국가기관 내부의 반발심은 실제로도 상당했다.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해 한층 강력해진 12·12 쿠데타 이후에도 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의 주한미국대사관 무관이었던 제임스 영이 그것의 증언자다.
제임스 영은 1994년 2월호 <월간조선>에서 자신이 1980년 1월에 서울 용산 육군본부 인근인 삼각지의 다방(커피점)에서 한국군 장교를 만난 일을 소개했다. 12·12 당일에 연행된 정승화(육사 5기) 계엄사령관과도 가깝고 김종필과 동기인 육사 8기들과도 가까운 이 장교는 자신이 반(反)전두환 쿠데타를 준비하는 그룹과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이 역쿠데타를 지지해줄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미국대사관뿐 아니라 주한미군사령부도 역쿠데타를 추진하는 한국 장교를 만났다. 당시의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위컴의 회고록을 사전에 입수해 요약·정리한 1999년 4월 27일 자 <중앙일보> 기사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 회고록 단독 입수'에 따르면, 위컴은 제임스 영보다 훨씬 빨리 그런 장교를 만났다.
위컴은 "12월 어느날 이른 아침 유엔사 본부 내 집무실에서 나는 예상치 않았던 방문객과 마주앉았다"고 회고했다. 그런 뒤, "그는 12·12사태에 대한 미국 측 입장을 문의한 뒤, 느닷없이 '미국은 역쿠데타를 지지할 준비가 돼 있는가. 역쿠데타의 목적은 전두환 일당을 축출하고 적법한 민정(民政)과 군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 있다'고 털어 놓았다"라며 그때를 떠올렸다.
이 시기에 전두환 역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미국에 접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그것을 우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확인하고자 대담한 행동을 벌였다. 위컴 쪽에 스파이를 심어놓았을 정도다. 위컴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연합사 내 사무실에는 한국군 육군 중령 하나가 새로 배속돼 왔다. 그런데 몇 주일 지나 연합사 미측 사무실 내 서류철을 뒤적이는 것이 목격됐다. 조사 결과, 그는 전 장군의 보안사 소속 장교였고, 연합사 내 정황을 보안사에 수시로 보고해 왔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전두환 축출을 도와달라는 한국군 일각의 요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불개입'이었다. <한국과 국제사회> 2020년 제4권 제2호에 실린 충남대 신현익·오영달 공동논문 '1979년 한국 신군부의 12·12쿠데타와 미국의 관망정책'은 지미 카터 행정부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미국의 12·12군사쿠데타 역전 시도는 기존의 한국 국내 정국의 안정에 대해 혼란을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어 한반도 안정 유지 및 공산화 저지라는 자신들의 정책에 배치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12·12쿠데타 역전 시도와 관련하여 불관여정책을 유지해 나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처럼 당시의 카터 행정부도 중동의 이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1979년 1월 16일, 친미 지도자인 팔레비 이란국왕이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 와중에 이집트로 망명했다. 팔레비 정권의 탄압을 피해 해외 망명 중이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2월 1일 귀국하고, 그달 11일 이란혁명이 발생해 팔레비왕조가 붕괴했다. 이런 상태에서 11월 4일에는 이란 시위대가 미국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는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역쿠데타로 인해 발생할지 모르는 한국의 정치적 동요가 이란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12·12에 대한 적극 개입을 주문하는 미국 내 여론을 무시하고 카터 행정부가 전두환을 묵인하기로 한 데는 그 점도 크게 작용했다. 위 논문은 "한국 군부 내 국수적 민족주의적 저항과 한국민의 제2의 이란화 가능성을 염려하여 불개입 자세를 취했다"고 말한다.
전두환 측도 미국의 그런 염려를 인지했다. 위 논문은 "신군부 장성들은 1979년 11월 4일부터 미국의 외교관들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인질로 억류된 상황에서 한국의 신군부 세력을 지나치게 자극해 자칫 '제2의 이란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어서 (미국의) 외교적 운신 폭이 극히 제한돼 있음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이 한국의 '역쿠데타' 움직임 돕지 않은 이유
미국은 한국 상황에 잘못 개입해 한국이 이란처럼 반미진영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염려했다. 이것이 결정적 요인 중 하나가 되어 미국은 전두환 쿠데타에 제동을 걸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한국군 내부의 역쿠데타 움직임도 돕지 않았다. 호메이니가 중동에서 미국의 시선을 빼앗은 것이 전두환이 동북아에서 군부 권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미국의 묵인은 이해관계 없는, 혹은 영향력 없는 제3자의 묵인이 아니었다. 한국 상황에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었던 1979년 당시의 묵인은 사실상의 지원이나 다름없었다.
그 같은 묵시적 지원에 힘입어 전두환은 1979년 겨울에 자신의 군부 권력을 안정시켰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1980년에 서울의 봄을 짓누르고 뒤이어 광주의 봄까지 짓밟았다. 그런 뒤, 그해 5월 31일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를 통해 행정부 권력까지 손에 넣었다.
전두환의 권력 찬탈은 순전히 한국 내의 힘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암묵적 지원에도 힘입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메이드 인 코리아'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이기도 했다. 메이드인코리아 전두환 역쿠데타 한미관계 위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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