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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10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젠더 논쟁

요약
  • 그리스 신화의 여신들을 현대 여성의 삶으로 재해석한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_리부트'가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 작품은 사랑과 결혼에 대한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세 여신의 논쟁을 통해 여성 대상 폭력과 젠더 문제를 현재형의 화두로 던진다.
[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_리부트'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_ 리부트'. 극단 산울림 제공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_ 리부트'. 극단 산울림 제공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8년 본격화된 미투 운동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젠더 문제에 대한 논의가 크게 확산됐다. 그로부터 10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2016년 초연한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의 여신들을 현대 여성의 삶으로 재해석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0년 만인 올해 '리부트'란 이름을 더해 다시 공연 중이다.

제우스의 명으로 올림포스의 12신이 소집되는 날, 먼저 도착한 아르테미스와 헤라, 아프로디테는 뜻하지 않게 한자리에 모인다.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세 여신은 곧 상대의 행동과 삶의 방식을 비난한다.

헤라는 남편 제우스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을 찾아내 응징해 왔다. 정작 제우스에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다른 여성들에게 분노를 돌리는 헤라를 아르테미스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헤라는 가족과 결혼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항변하는 한편, 여러 남자와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는 아프로디테를 비난한다.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남성의 자유로운 연애에는 관대하면서 왜 여성의 욕망만 비난하느냐고 맞선다. 아르테미스는 더 나아가 남성과의 연애 자체가 부질없으며,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성을 위험에 빠뜨릴 뿐이라며 거부한다. 그런 아르테미스를 나머지 두 여신은 답답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 다른 신념을 가진 세 여신은 서로의 선택을 거침없이 공격한다. 말투는 거칠지만 각자의 신념에서 출발한 주장에는 저마다의 논리가 있다. 일부일처제와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헤라, 자유로운 사랑과 다자연애를 긍정하는 아프로디테, 급진적인 여성 독립과 비혼을 주장하는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사랑관을 옹호하면서 상대의 삶의 방식을 공격한다.

네 개의 패브릭 의자와 스탠드 조명, 물병과 컵이 놓인 테이블로 구성된 무대는 토론회장을 연상시킨다.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언어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논쟁의 테이블에 올린다. 그러나 하나의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은 아니다.

세 여신은 서로를 설득하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제우스와의 결혼 과정, 아프로디테의 연인인 아도니스의 죽음, 아르테미스를 흠모한 알페이오스의 집착 등 각자의 내밀한 과거를 꺼내놓는다. 그리스 신화 속 사건들은 무대 위에서 결혼제도에 갇힌 아내의 삶, 교제 폭력과 스토킹 등 현대의 여성 폭력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_ 리부트'. 극단 산울림 제공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_ 리부트'. 극단 산울림 제공

서로를 비난하던 여신들의 언어는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공유하면서 점차 걱정과 위로의 언어로 바뀐다. 진심에서 우러난 충고와 공감은 서로를 가로막던 신념의 벽에 조금씩 균열을 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우스가 또다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헤라는 상대를 응징하기 위해 자리를 뜬다. 아르테미스 역시 기약하기 어려운 약속을 남긴 채 먼저 떠나고, 아프로디테는 다시 헤르메스를 유혹한다. 결국 세 여신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은 채 막을 내린다. 다만 서로를 향한 공감과 이해는 이전과 다른 관계의 가능성,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남긴다.

세 여신의 과거를 재연하는 장면에는 헤라의 남편 제우스, 아프로디테의 헤어진 연인 아레스, 전령 헤르메스, 아르테미스의 쌍둥이 동생 아폴론 등 여러 남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두 명의 남성 배우가 여러 역할을 나눠 맡는 1인 다역은 연극적 재미를 더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지위와 성격을 지녔지만, 여러 장면에서 여성들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행동을 통제하려는 존재로 등장한다.

10년 만에 '리부트'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_ 리부트'는 일부 에피소드와 인물의 태도를 수정했지만, 기본 구조와 문제의식은 유지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도 부산 돌려차기 사건,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비롯해 스토킹, 교제 폭력, 성폭력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지속돼 왔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는 여성 대상 폭력은 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현재형으로 만든다. 세 여신의 사적인 논쟁을 코믹한 B급 감성으로 풀어내지만 마냥 편하게 웃고 즐길 수만은 없는 이유다. 공연은 다음 달 4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에서 이어진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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