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생성형 인공지능(AI)을 이용해 글을 썼다는 의혹만으로 거액의 출판 계약이 무산되고, 유력 문학상 후보에서 제외되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잇따르고 있다. AI가 실제 원고 작성에 사용됐는지 가려낼 확실한 수단은 없는 상황에서 작가가 자신의 창작 과정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글로벌 출판계의 현안으로 떠올랐다.◆공쿠르는 탈락, 영연방상은 유지최근 가장 큰 논란이 벌어진 곳은 프랑스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주관하는 아카데미 공쿠르는 지난 25일 캐나다·아이티 작가 텔리송 오렐리앙의 소설 <"세테 사 우 무리(C’était ça ou mourir·그거 아니면 죽는 거였어>를 올해 후보 명단에서 제외했다.
지난 8월 그라세 출판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갱단 폭력이 만연한 고국을 떠난 교사가 12개국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약 3만5000부가 팔렸고 대형 문화유통업체 프낙이 주관하는 '프낙 소설상'도 받았다. 해외 판권도 20여개국에 판매됐다.
논란은 지난 21일 소셜미디어 X의 한 계정이 AI 탐지 프로그램 '팽그램'으로 작품을 분석한 결과 "거의 전부 AI로 작성됐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AI 탐지 프로그램에 따라 판정은 엇갈렸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쓴 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 저자가 과거 문학상 출품작에서 다른 저자의 문장을 표절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아카데미 공쿠르는 후보 제외 결정을 발표하면서 과거 표절 문제와 함께 여러 연구자와 언론인의 분석이 AI 작성 가능성을 뒷받침했다고 밝혔다. 오렐리앙은 AI 사용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AI 탐지 결과를 어디까지 신뢰할 것인지도 문학계의 새로운 고민이 되고 있다. 올해 영연방 단편소설상에서는 5개 권역별 수상작 중 한 작품을 두고 AI 사용 의혹이 불거졌다. 영국 문예지 '그랜타'는 이후 자신들이 직접 심사하지 않은 외부 문학상 수상작을 자동 게재하던 관행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상을 주관하는 영연방재단은 초고와 수정 과정을 재검토한 뒤 기존 심사 결과를 유지했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자미르 나지르의 <더 서펜트 인 더 그로브(The Serpent in the Grove)>는 이후 전체 대상을 받았다. 재단은 AI 탐지 기술이 완전한 판별 수단이 아니며, 미출간 원고를 외부 탐지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행위 자체도 저작권과 동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계약 흔드는 AI 의혹…검증·표시제 확산출판 계약 단계에서도 AI 의혹은 실제 사업 리스크로 번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출신 미국 작가 제리 팔라데의 데뷔 범죄소설 <콜 미, 아일 하이드 더 바디(Call Me, I’ll Hide the Body)>는 14개 출판사가 참여한 경쟁 입찰 끝에 맥밀런 산하 미노타우르가 200만달러가 넘는 계약금을 제시해 미국 출판권을 확보한 화제작이었다.
하지만 한 편집자가 AI 활용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팔라데는 AI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이후 면담에서 원고 작성 과정에 관한 일부 설명이 달라지자 에이전시는 작가와의 관계를 끊고 원고를 회수했다. 이미 성사된 200만달러(약 28억원) 규모의 계약도 무산됐다. 에이전시는 작품의 완성도 자체는 높게 평가했다. 문제가 된 것은 소설의 질보다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썼는지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AI 사용 의혹이 출간 자체를 멈춰 세운 사례도 있다. 프랑스계 출판사 아셰트는 올해 미아 발라드의 공포소설 <샤이 걸(Shy Girl)>에 AI 생성 문장이 포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유통을 중단했다. 발라드는 자신이 AI로 소설을 쓴 적은 없으며 과거 작업에 참여한 다른 사람이 AI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 출판업계는 AI를 사후에 적발하는 데서 창작 과정을 확인하고 사용 범위를 공개하는 쪽으로 대응을 옮겨가고 있다. 미국작가조합은 인간이 본문을 작성했음을 확인하는 '인간 저작(Human Authored) 인증' 제도를 확대했고, 영국 작가협회도 유사한 방식을 도입했다.
한국 출판계도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한국출판인회의는 29일 서울 성산동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출판·AI 정책포럼을 열고 AI 활용 원칙을 발표한다. 현재는 AI 사용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활용 범위를 단계별로 나눠 책에 표시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단순 자료 검색 등 보조적 활용은 1단계, 문장이나 이야기 생성에 적극 활용한 경우는 2~3단계로 구분해 독자가 AI 개입 정도를 알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출판계 일각에서는 이런 기준을 향후 법이나 제도에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