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주주환원·밸류업 사례/그래픽=윤선정#미국 플래시 메모리 저장장치 업체 샌디스크는 지난달 향후 3년간 FCF(잉여현금흐름) 100%를 자사주 매입으로 주주에게 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루이스 비소스 샌디스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사업에 투자한 뒤" 남는 잉여현금은 주주에게 환원하겠다고 말했다. 성장을 위한 투자는 충실하게 하되 필요 이상의 현금은 쌓아두지 않고 주주에게 돌려주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다. 메모리 고점론 여파로 지난 7월 29일 1015.89달러(종가)까지 내렸던 주가는 주주환원 원칙 발표 이후 상승세를 나타내며 지난 25일 1777.80달러로 75% 상승했다.#일본 히타치는 밸류업 모범사례로 꼽힌다. 한때 부실기업으로 분류되던 히타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대대적으로 수술해 우량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과거에는 상장 자회사를 여럿 거느렸지만 금속·건설 분야 등의 자회사를 차례로 완전자회사로 편입하거나 매각했다. 매각으로 확보한 현금은 핵심 사업 중심의 M&A(인수·합병)와 재투자에 썼다. 현재 히타치의 ROE(자기자본이익률)는 12%를 웃돌고 PBR(주가순자산비율)은 3.7배에 이른다.
이들 사례는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같은 주주환원 자체보다 기업의 성장과 경쟁력을 위한 자본배분이 밸류업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자사주 매입·소각 등 주주환원 규모 발표만 이어지고 있다. 기업가치를 높이는 진정한 밸류업을 위해서는 주주환원과 자본배분 원칙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범준 가톨릭대 회계학과 교수는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의 전제 조건은 기업이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어야 주주에게 배분할 수 있다"며 "문제는 자사주 소각이나 TSR(총주주수익률)에만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회사 본연의 경쟁력을 위해 적절히 투자하는지, 미래를 준비하는지 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사주 매입·소각 같은 주주환원은 기본적으로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에서 사업에 필요한 투자 재원을 뺀 FCF를 주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리하게 자사주를 사들이느라 연구개발·설비투자를 소홀히 하면 기업 성장이라는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시장 역시 주주환원 자체보다 기업의 수익 창출력에 주목하고 있다. 연초 자사주 정책 기대감에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의 주가가 큰 폭으로 뛰었다가 차익실현 매물이 쏟아진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정빈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3차 상법개정 이후, 자사주 프레임 변화' 보고서에서 "중장기적으로 주가를 결정하는 건 여전히 기업의 이익 창출 능력이며 자사주 정책은 이를 보완하는 변수에 불과하다"며 "이제는 자사주 소각 이후에도 ROE를 유지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기업을 선별하는 단계로, 투자 전략을 펀더멘털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해외 투자자들 역시 한국 기업이 펀더멘털 강화를 밸류업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병묵 한국거래소 뉴욕사무소장은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며 "자본효율성을 높여 ROE를 8%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등 ROE 제고 계획을 제시해 달라는 요청이 부쩍 많아졌다"고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인식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