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한 도로에 ‘전쟁 반대 중립 찬성’ 슬로건이 붙어 있다. AP연합뉴스중립국 스위스에서 군사·방위동맹과의 협력이나 국제사회의 독자 제재 동참을 엄격히 제한하는 ‘중립성 강화’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것으로 전망됐다.27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실시된 중립성 강화 국민투표 직후 공영방송 SRG와 여론조사기관 GFS 베른의 출구조사에서 반대 의견이 71%에 이르는 것으로 예측됐다.
이번 국민투표는 영구적·군사적 중립성을 헌법에 명문화해 상황에 따라 중립성을 유연하게 해석하고 이행해 온 정부의 재량권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가 없는 한 무력분쟁 등을 이유로 한 정부의 독자 제재는 전면 금지된다. 아울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등 군사·방위동맹과의 협력도 스위스가 직접 공격받는 경우로만 한정된다. 사실상 영세중립국 지위를 지금보다 훨씬 폐쇄적인 형태로 굳히겠다는 취지다.
스위스는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직후부터 국제적으로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헌법에는 정부가 이 중립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없다. 이에 역대 정부는 국제 정세 변화에 맞춰 중립성을 신축적으로 해석해왔다. 나토·유럽연합(EU)에는 가입하지 않으면서도 나토의 평화파트너십이나 국제 평화유지 임무에는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식이다.
개정안에 찬성하는 우익 스위스국민당(SVP)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한 대러시아 제재 동참이 스위스의 전통적 중립 노선을 흔들어왔다고 주장하며, ‘전쟁 반대, 중립 찬성’이라는 구호를 내세워왔다.
실제로 스위스 정부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EU가 내놓은 20차례의 대러시아 제재 패키지를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당시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과는 다른 행보로 스위스가 사실상 우크라이나 쪽에 서면서 중립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도 나온 바 있다.
반면 스위스 연방정부와 대다수 정당은 이번 개정안에 강하게 반대해왔다. 이냐치오 카시스 외무장관은 최근 TV 토론에서 “중립성은 그동안 항상 어느 정도 유연하게 적용돼 왔다”며 “중립이 곧 무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날 출구조사 결과와 관련해 녹색당의 시벨 아르슬랑 의원은 유권자들이 SVP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했다고 평가하면서 국제법이 유린되는 상황에서도 책임을 회피한 채 스위스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려는 시도였다고 지적했다.
투표 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반대 여론이 우세했다. SRG와 GFS 베른 조사에서는 찬성이 34%, 반대가 63%로 나타난 바 있다. 파비오 바세르팔렌 베른대 유럽정치학 교수는 로이터통신에 “스위스 유권자들이 중립성 자체는 지지하지만 이를 현 정부 방식대로 유연하게 운용하는 데도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