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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17일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비자발급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있는 토니버크 내무장관 |
| ⓒ AAP. Lukas Coch |
호주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온 지 어느덧 20년째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장에서 똑똑히 체감해왔다. 특히 나는 관광 도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골드코스트의 한 대형 호텔에서 매일 발로 뛰는 현장직 노동자다. 그렇기에 지금 호주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비자 대란'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 당장 내 일터의 문제로 다가온다.
요즘 만나는 이민자나 유학생들은 하나같이 비자 걱정뿐이다. 자고 나면 규정이 바뀌니 다들 "다음 달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불안해 한다.
호주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은 농경 같은 1차 산업과 관광·호스피탈리티 같은 서비스업이다. 그리고 이 현장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은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온 워킹홀리데이 청년들과 유학생들이다. 솔직히 현장의 진실을 말하자면, 이 청년들이 없으면 호주는 당장 내일부터 호텔 문을 닫아야 하고 사회 자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유학생도, 동반 가족도 "들어오지 마라"
곧 있을 총선을 앞두고 집값과 물가가 오르자, 알바니지 노동당 정부는 그 원인을 '이민자 급증'으로 지목했다. 표심을 얻기 위해 이민자 수를 줄이겠다며 비자 문턱을 전방위로 높이는 이유다. 관광비자나 졸업생 비자로 체류를 연장하던 '비자 호핑(Visa Hopping)' 규제를 강화했고, 유학생 비자 심사(GST) 기준을 높였다.
2026년 유학생 신규 수용 한도를 29만 5000명으로 제한하는 상한선(Cap)을 두는가 하면, 유학생의 배우자나 자녀가 받는 동반 비자(Dependent Visa)까지 원칙적으로 금지하겠다고 나섰다. 이민자를 확실히 줄이고 있다는 걸 눈으로 보여주겠다는 계산이다.
도시 집값을 잡겠다고 조인 비자 정책이 정작 일손이 절실한 현장의 목을 죄고 있다. 밭에서 농작물을 거두거나, 호텔 객실을 청소하고, 늦은 밤까지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일처럼 고되고 때 묻는 일은 호주인 대다수가 기피한다. 편하고 번듯한 일만 찾으려 하지, 힘들고 3D라 불리는 현장 노동에는 발을 디디지 않는 게 현실이다.
내가 일하는 호텔만 해도 마찬가지다. 당장 객실을 정비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뒤처리를 하는 그 고된 일손의 절대다수가 워킹홀리데이 청년들이다. 청년들이 있었기에 호주의 신선한 농산물이 마트에 매일 깔리고, 유명 휴양지의 호텔과 레스토랑이 차질 없이 문을 열 수 있었다.
밭에서는 작물이 썩는다
정부가 연간 이민자 목표치를 맞추겠다며 24개국에 달하는 워킹홀리데이(Subclass 417/462) 비자 발급을 잠정 중단하거나 미루면서, 수확철을 맞은 농가와 서비스 현장에 비상이 걸렸다. 주요 인력 공급국이었던 한국 청년들의 유입도 급감했다.
호주 농가는 농촌에서 88일 이상 일하면 비자를 연장해 주는 '세컨·써드 비자' 제도로 일손을 겨우 메워왔다. 하지만 입국길이 막히면서 밭에 영근 과일과 채소를 거두어들일 손길이 끊겼다. 호주농민연맹(NFF)은 "도시 집값을 잡겠다는 정책 때문에 농촌에서는 작물을 거두지 못해 밭을 엎을 지경"이라며 비자 발급을 당장 정상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장 모르는 정치권의 탁상행정
정치인들이 쾌적한 의사당에 앉아 숫자를 깎아내릴 궁리만 하는 사이, 현장의 노동자들과 사업주들만 골탕을 먹고 있다. 인력이 없으니 남아있는 현장 직원들에게 업무 과부하가 쏠리고, 식당과 호텔들은 영업시간을 줄이거나 객실을 다 돌리지도 못한다.
전문가들도 이번 정책의 모순을 지적한다. 도시 주택난을 완화하겠다고 이민자를 막았지만, 그 결과 농촌과 현장 인력이 말라 농산물 출하가 줄고 서비스 공급이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농작물 값이 뛰면 마트 신선식품 가격이 오르고, 결국 대도시 주민들의 장바구니 물가가 다 함께 오른다. 도시 살림을 돕겠다는 비자 정책이 도리어 도시인들의 식탁을 위협하는 모양새다.
20년 동안 호주 현장에서 땀 흘리며 지켜본 이번 비자 대란은 이민 정책의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숫자 맞추기에 급급한 정치권의 오만이 부른 결과다. 비자 문제로 밤잠을 설치는 유학생들, 거두지 못한 농작물을 바라보는 농민들, 그리고 업무 과부하로 지쳐가는 현장 노동자들의 한숨이 호주 전역에 깊게 드리우고 있다. 진짜 이 나라를 움직이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정치권이 깨닫지 못한다면, 호주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는 앞으로 더욱 혹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