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버넘 영국 총리가 29일(현지시간)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노동당 연례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앤디 버넘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 사실상 금기시돼온 영국과 EU의 관계 재설정을 위한 국가적 논의를 제안했다. 브렉시트가 “득보다 폐해가 더 많았다”고 평가하면서 오는 11월 예정된 영국·EU 정상회담을 계기로 장기적인 관계의 여러 선택지를 제시하고 국민적 합의를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버넘 총리는 29일(현지시간)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정상회담을 계기로 영국과 유럽 파트너들의 장기적인 관계를 위해 여러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겠다”며 “하나의 방안에 합의할 수 있을지 보겠다”고 말했다.
버넘 총리는 브렉시트가 영국에 “통제권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며 경제 성장과 이민 문제에서 오히려 통제력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또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정치적·경제적 혼란을 언급하며 “브렉시트는 득보다 폐해가 더 많았다”고 했다.
그는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 10년간의 표류와 분열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내가 정치적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한다. ㅎ지만 누군가는 고통의 장벽을 뚫고 반창고를 떼어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버넘 총리의 발언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서 꺼내기 어려웠던 주제를 다시 정치권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2016년 국민투표 이후 영국 사회는 브렉시트를 둘러싸고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었고, 노동당 정부 역시 2024년 집권 이후 EU 재가입 대신 양자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버넘 총리는 과거 영국의 EU 재가입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지만, 최근에는 2016년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한다며 재가입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혀왔다. EU 단일시장이나 관세동맹에 다시 들어가는 방안도 배제하고 있다. 대신 EU와 안보·무역 등에서 관계를 한층 긴밀하게 만드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것이 현재 노동당 정부의 방침이다.
EU는 영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 데 원칙적으로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오는 11월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는 아직 제시하지 않고 있다.
영국 내 여론은 EU와의 관계 개선에 비교적 우호적이다. 유고브가 지난 6월 실시한 조사에서는 EU 재가입에 55%가 찬성하고 34%가 반대했다. 재가입까지는 아니더라도 EU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 데는 59%가 찬성했다.
버넘 총리는 이날 브렉시트뿐 아니라 영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겨냥한 장기 개혁 구상도 내놨다. 국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국가 돌봄 서비스’를 도입하고, 이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2030년부터 현행 국가연금 ‘트리플 록’ 제도를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연금 지급액 인상을 보장하던 제도를 폐지해 노인 돌봄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선거제도 개편도 추진한다. 버넘 총리는 차기 총선부터 비례대표제를 포함한 선거제도 개편 방안을 검토할 국가위원회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영국은 지역구별 최다 득표자가 당선되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어 여러 정당으로 표가 분산되는 최근의 정치 지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버넘 총리는 “우리가 지금처럼 하다가 30%쯤 되는 득표율로 분열적인 정부에 총리실을 내준다면 공적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버넘 총리가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 가장 논쟁적인 정치 토론을 야기할 수 있는 급진적 정책의 주사위를 던졌다”고 전했다. AP통신도 “버넘 총리가 높은 리스크의 정치적 연설에서 영국에 급진적인 변화를 약속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BBC는 이들이 당장 실행 가능한 방안이기보다는 2029년 치러질 차기 총선에서 집권 노동당이 내세울 공약에 가깝다고 짚었다.
2024년 7월 스타머 총리 취임 직후 급락한 노동당 지지율은 버넘 총리 취임 이후 다소 회복했지만 여전히 20%대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