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스파이 기관에 연구 성과 유출
英 보안장관 “즉각 단절하라” 대학에 서한
“中 자금 받으면 스파이 공범” 이례적 경고
미국 FBI(연방수사국)에 해당하는 영국 국내 정보기관 MI5가 자국 대학과 연구진을 향해 중국 국가안전부(MSS) 위장 조직과 관계를 즉각 단절하라는 이례적인 경고를 내렸다. 중국 정보 당국이 학술 연구 지원을 미끼로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은밀하게 빼돌리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긴급 조치다.
MI5는 30일(현지시각) 홈페이지에 간첩 경보(Espionage Alert)를 올리고 “중국통용기술연구원(CGTRI·中国通用技术研究院)이 국가안전부(MSS)와 매우 강한 연계를 맺고 있다”고 밝혔다. MI5가 대학 등 특정 집단을 향해 대외적으로 간첩 경고를 직접 발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 맨체스터 주재 중국 영사관 직원들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이 담긴 포스터를 철거하고 있다. /연합뉴스국가안전부는 한국 국가정보원처럼 해외 첩보와 국내 방첩을 함께 맡는 중국 정보기관이다. MI5는 중국 국가안전부가 연구원 형태로 위장해 100명이 넘는 영국 학자들에게 연구 자금을 은밀히 지원해왔다고 밝혔다. 이들은 인공지능(AI)과 사이버 보안, 비밀 통신 시스템을 비롯해 평범해 보이는 파일이나 메시지 속에 비밀 정보를 몰래 숨기는 심층암호(스테가노그래피) 기술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영국이 주도한 소셜미디어 정보를 대량으로 긁어모으는 인터넷 기술 연구 결과도 중국 정보기관 손에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MI5는 “해당 중국 기관 핵심 목적이 중국 국가안전부 간첩 활동 역량을 기술적으로 향상하는 데 있었다”고 했다.
중국 정보기관은 연구 자금을 영국 대학 계좌로 곧장 보내지 않았다. 중국 안에서 영국 연고 학자들이 진행하는 연구 과제를 지원하는 식으로 우회 송금하는 방식을 택했다. MI5는 중국통용기술연구원이 중국에서 진행되는 기술 관련 연구에 돈을 대면, 이 연구 과제에 영국 연고 학자들이 공동 연구자로 참여하는 식으로 기술 유출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일부 영국 학자의 경우 연구비 외에도 중국 측 명예직과 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영국 정부는 MI5 발표 직후 국가 안보를 이유로 빠른 대응에 나섰다. 댄 자비스 영국 보안장관은 이날 모든 영국 대학 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해당 중국 기관과 맺은 관계를 최대한 빠르게 종료하라고 촉구했다. 자비스 장관은 성명에서 “MI5 경고는 중국 정보 당국이 영국 학자들 전문 지식과 연구에서 은밀하게 이익을 얻으려 한다고 폭로한 것”이라며 “이는 영국과 동맹국 국가 안보를 근본적으로 훼손한다”고 했다. MI5는 대학과 연구진이 경고를 무시하고 연구를 계속할 경우, 2023년 제정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외국 정보기관을 돕거나 물질적 이익을 취한 혐의로 기소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새 중국 대사관 건립 예정지인 영국 런던 왕립 조폐국 밖에 경찰이 서 있다. /연합뉴스영국 대학은 한때 전 세계적인 학문의 산실이었지만, 지금은 대학이 연구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가 굳어졌다. 영국 고등교육 규제기관인 학생청(Office for Students)이 올해 8월 공개한 원가 분석(TRAC)에 따르면 2024~2025학년도 대학 연구 수입은 128억파운드였지만, 연구에 실제로 든 비용은 이보다 훨씬 많은 191억파운드에 달했다. 대학들은 실제 연구에 들어간 비용 가운데 67%만 회수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영국 전체 대학들은 한 해 63억파운드(약 11조원)씩 연구 관련 적자를 보고 있다.
학생청은 올해 보고서에서 2024~2025학년도 적자를 낸 대학이 35.8%였고, 2025~2026학년도에는 42.7%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대학들은 적자 가운데 일부를 정부 지원금으로 메우고 있지만, 이 지원금 또한 최근 15년에 걸쳐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당초 영국 연구회(Research Councils)가 제시한 과제를 이행할 때, 정부가 지원해 주는 연구비는 규정상 연구 원가 대비 최대 80%를 주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이 연구 원가 회수율은 2010~2011학년도 78%를 정점으로 지난해 70.1%까지 떨어졌다.
그동안 영국 대학들은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는 연구비 구멍을 중국 자금으로 메웠다. 중국 교육부가 올해 5월 새로 승인한 해외 대학과의 공동 교육 협력 219건 가운데 5분의 1 이상은 영국 대학 몫으로 돌아갔다. 영국은 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를 제치고 협력 상대국 1위에 올랐다.
영국 싱크탱크 시비타스(Civitas)에 따르면 영국 대학들은 2017년부터 6년 동안 중국 기관에서 최대 1억5602만파운드(약 2796억원)를 받았다. 이 자금 가운데 3분의 1은 중국 인민해방군과 연계된 기관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많은 돈을 댄 곳은 중국 IT 기업 화웨이였다. 화웨이는 영국 정부가 2020년 5G 통신망에서 화웨이 납품을 금지하기로 한 뒤에도 영국 대학에 최소 1390만파운드(약 249억원)를 더 지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24년 세계적인 학술기관 임페리얼칼리지런던(ICL) 학자들이 중국 군산복합체 핵심 기관 인사들과 최소 논문 5편을 함께 썼다고 전했다.
18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라'라는 주제로 열린 행사에서 중국 관영 차이나데일리 편집장 취잉푸가 영상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MI5는 이번 경보에서 중국 기관과 협력할 때 최종 자금원까지 확인하라고 연구자들에게 권고했다. 영국에 앞서 유럽연합(EU)은 연구혁신 지원 사업 ‘호라이즌 유럽’에서 중국 기관을 걸러내기 시작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채택한 2026~2027년 연구 계획에서 중국 소재 기관을 보건, 시민 안보, 디지털·산업·우주 분야 과제에서 집중적으로 제외했다. 중국 국방 연구 핵심 대학 7곳을 일컫는 국방칠자(國防七子)는 모든 과제 참여가 막혔다. 독일 프리드리히알렉산더대(FAU)는 2023년 6월부터 중국 정부 장학기관 국가유학기금관리위원회(CSC)가 생활비를 대는 연구자를 받지 않고 있다. 네덜란드 역시 지난해 4월부터 민감 분야에 한해 외국인 연구자 심사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유럽에서 처음으로 발의했다.
찰스 파튼 영국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선임연구원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대학과 연구 기관 등이 이러한 안보 위협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조치”라고 했다.
반면 주영 중국 대사관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영국 정보기관이 관련 중국 단체에 제기한 비난은 상상에 불과하며 순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반발했다. 대변인은 “영국 대학과 중국 간 교류는 항상 자발적 기반 위에서 법과 규정을 준수하며 이루어졌다”며 “이러한 근거 없는 주장에 단호히 반대하며 영국 측에 엄숙한 항의를 제기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