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난 직면한 美 산업계
동맹국 자금으로 돌파구
공장 유치서 전력 확보로 정책 방향 틀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를 앞세워 한국과 일본에서 받아낸 대미(對美) 투자금이 미국 원전과 가스발전소로 몰리고 있다. 두 나라 투자 사업으로 지금까지 공개된 3053억달러(약 413조원) 가운데 81%인 2486억달러(약 336조원)가 발전소 건설에 배정됐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공장 증설로 전기가 모자라자,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국 자금을 미국 산업계 가장 큰 병목인 전력 인프라에 쏟아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 30일(현지시각) 백악관 집무실에서 한국이 최대 2000억달러(약 270조원)를 미국에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1일 텍사스주 엔시널에 223억달러(약 30조원)를 들여 AI 데이터센터에 직접 전기를 대는 6.5GW급 가스발전소를 짓고, 2029년 상업 운전을 시작할 계획이다. 미국에 대형 원전 8기를 짓는 데도 1200억달러(약 162조원)를 넣고, 이 가운데 2기는 한국형 원전 APR1400 설계를 쓴다. 두 사업 규모를 합치면 1423억달러(약 192조원)로 한국 투자 발표액 가운데 71%를 차지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9월 30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하워드 루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함께 한국 투자 계획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한국에 앞서 일본이 지난해 관세를 15%로 낮추는 대가로 약속한 투자금 5500억달러(약 744조원)도 발전소로 향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2월 17일 발표한 일본 1차 투자 계획 360억달러 가운데 333억달러(약 45조원)는 오하이오주 포츠머스에 짓는 9.2GW 가스발전소에 들어갔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당시 이 발전소를 역대 최대 가스발전 시설이라고 소개했다. 미 에너지부는 한 달 뒤인 3월 20일 일본이 투자한 발전소 부지에 10GW급 데이터센터 단지가 같이 들어선다고 밝히며, 발표문 제목을 ‘미국의 AI 미래에 전력을 공급한다(Power America’s AI Future)’로 달았다.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은 “연방 부지 같은 정부 자산을 활용해 발전 설비를 늘리고, 미국이 AI 경쟁에서 이기도록 하겠다”고 했다.
바로 다음 달 3월 19일 미·일 정상회담에 맞춰 나온 2차 투자 계획으로 확정한 최대 730억달러(약 99조원)도 모조리 발전소에 몰렸다. 일본 측 2차 투자 계획 자금은 GE버노바히타치가 테네시·앨라배마주에 짓는 소형모듈원자로(SMR)에 최대 400억달러, 펜실베이니아·텍사스주 가스발전소 2곳에 최대 330억달러가 들어간다. 미 상무부는 두 가스발전소 전력을 인접 데이터센터에도 공급한다고 명시했다. 1·2차를 합친 일본 사업 1090억달러(약 147조원) 가운데 97.5%가 발전소 몫으로 돌아갔다.
한·일 대표 투자 계획에 해당하는 일본 오하이오 발전소(9.2GW)와 한국 텍사스 발전소(6.5GW)를 더하면 총 발전 용량은 15.7GW에 달한다. 이는 한 기당 발전용량 1.4GW인 APR1400 원전 11기에 맞먹을 만큼 큰 수치다. 한국 원전 전체 설비용량(약 26GW) 대비 60%에 이르는 발전 설비를 한국과 일본 자금으로 미국 땅에 세운 두 발전소가 채울 전망이다. 러트닉 장관은 지난 2월 17일 일본과 1차 투자 계획을 발표할 당시 “일본이 자본을 대고, 인프라는 미국에 짓는다”며 “일본은 대가로 투자 수익을 거두고, 미국은 전략 자산과 늘어난 산업 역량, 강해진 에너지 지배력을 얻도록 구조를 짰다”고 했다.
트럼프 1기와 바이든 행정부 때 대미 투자는 주로 개별 외국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미국에 공장을 짓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대만 TSMC는 트럼프 1기인 2020년 애리조나 반도체 공장 건설을 발표했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도 반도체지원법(CHIPS Act)으로 반도체 공장 건설 보조금 390억달러(약 53조원)를 마련했다.
그러나 지금은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지어 놓고도 전기를 대지 못해 정상적인 가동이 어려워지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요동치는 태양광이나 풍력 대신, 24시간 내내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기저 전원이 필수적이다. 오랫동안 전력 수요를 태양광과 풍력 같은 친환경 에너지 중심으로 재편한 탓에 미국 에너지 시장은 최근 AI 관련 데이터센터와 제조업 부활을 기점으로 극심한 전력난을 겪는 중이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이달 9일 단기에너지전망에서 미국 전력 판매량이 올해 4135테라와트시(TWh), 내년 4211TWh로 2년 연속 최대치를 경신한다고 내다봤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4월 보고서에서 지난해 미국 전력 수요가 한 해 만에 2% 늘어 이전 10년 평균 증가율의 세 배를 넘었고, 증가분 약 절반을 데이터센터가 차지했다고 집계했다. EIA 역시 전력 수요 급증 원인으로 AI 데이터센터 개발과 제조업 확대를 꼽았다. 특히 이번에 한국 자금이 들어가는 텍사스주와 오클라호마·아칸소·루이지애나를 묶은 지역은 올해 미국 전력 판매 증가분기준 20%, 내년 예상치 중 40% 가까이를 차지한다. 일본 자금이 들어간 가스발전소 3곳도 모두 같은 부지나 인접한 데이터센터에 전기를 대도록 설계됐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해외 기업 공장을 유치하는 단계를 넘어, 동맹국 자본으로 AI 데이터센터와 산업 시설을 움직일 막대한 전력 인프라까지 미국 내부에 선점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기업이 사업성을 따져 공장을 짓던 기존 외국인직접투자(FDI)와 달리, 미국 정부가 투자처를 고르고 동맹국 정책금융기관이 돈을 대 미국 산업 병목을 해결하는 길을 텄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30일 한국 투자를 발표하면서 “관세 합의가 없었다면 이런 대형 사업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