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4월부터 은행 9시30분 개점
고령층·직장인·자영업자 불편 우려
# 서울 도봉구에 사는 78세 강아무개씨는 최근 만기가 된 정기예금을 다시 예치하려고 오전 일찍 집을 나섰다. 스마트폰으로도 처리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모바일뱅킹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직접 은행 창구를 찾기로 했다. 평소 이용하던 지점은 몇 년 전 문을 닫아 버스로 20분가량 떨어진 다른 영업점까지 가야 했다. 오전 9시 개점 시간에 맞춰 도착해 업무를 마친 뒤 병원 진료를 볼 계획이었지만, 내년부터 은행 문이 30분 늦게 열리면 같은 일정을 소화하기가 빠듯해진다.
강씨처럼 은행 창구를 직접 찾는 고령층의 불편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은행이 내년 4월부터 개점 시간을 오전 9시에서 오전 9시30분으로 늦추기로 하면서다. 고령층뿐 아니라 출근 전 은행을 찾는 직장인과 오전 시간대 현금 업무가 필요한 자영업자 등 대면 창구 이용자 전반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 시내 한 은행 대출 창구 ⓒ연합뉴스점포 줄었는데 이용시간까지…고령층·직장인 불편 커지나
1일 금융권에 따르면,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과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는 지난달 28일 산별 중앙교섭을 잠정 타결했다. 합의안에는 내년 4월부터 은행 영업점 개점 시간을 오전 9시30분으로 늦추는 내용이 담겼다. 폐점 시간은 오후 4시로 유지된다. 최종 합의가 이뤄지면 하루 영업시간은 현재 7시간에서 6시간30분으로 단축된다. 코로나19 당시 한시적인 단축 영업을 제외하면 노사 합의로 상시 영업시간을 줄이는 것은 처음이다.
영업시간 단축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계층은 고령층 등 비대면 금융 이용이 어려운 고객들이다. 모바일·인터넷뱅킹이 확산했지만 디지털 기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대출·외환·각종 상담처럼 직접 영업점을 찾아야 하는 업무도 여전히 적지 않다. 문 여는 시간이 늦춰질수록 이들이 대면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선택지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은행 창구에 대한 접근성 자체가 이미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16개 은행 점포는 올해 2분기 말 5505곳으로 3년 전보다 235곳 감소했다. 가까운 지점을 찾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용 가능 시간마저 짧아지면 고령층과 디지털 취약계층의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
창구 업무를 일부 대신할 수 있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도 빠르게 줄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국 16개 은행이 운영하는 ATM은 2020년 3만7537개에서 지난해 2만9810개로 약 5년간 20.6% 감소했다. 게다가 ATM은 출금 한도도 1회 100만원, 하루 600만원 등으로 제한돼 있어 고액 현금 인출이나 상담이 필요한 업무까지 대체하기는 어렵다.
여파는 고령층에만 그치지 않는다. 출근길에 은행 업무를 보던 직장인은 점심시간을 쪼개 쓰거나 반차·연차를 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자영업자 역시 영업 시작 전 현금 입출금이나 여러 창구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빠듯해진다. 영업시간이 짧아지면 고객이 개점 직후나 점심시간, 마감 직전에 몰리면서 혼잡과 대기시간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지난 5월1일 여의도 일대에서 열린 제136주년 세계노동절 기념 한국노총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 금융노조 우리은행지부 ⓒ금융노조 제공"9시에 손님 받으려면 8시 출근"…노조가 단축 요구한 이유
금융노조는 이번 영업시간 조정이 디지털 금융 확산에 따른 고객 이용 행태의 변화와 은행원의 실질적인 노동시간을 함께 고려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모바일·인터넷뱅킹이 보편화하면서 송금과 입출금 등 단순 업무를 위해 영업점을 찾는 고객이 과거보다 줄어든 만큼 오프라인 영업체계도 달라진 금융 환경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은행 직원들의 조기 출근 문제도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은행원들은 오전 9시 개점에 맞춰 전산 시스템을 확인하고 현금 시재 등을 준비하기 위해 통상 영업시간보다 30분에서 1시간 일찍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개점 시간을 오전 9시30분으로 늦추면 이 같은 준비 업무를 정규 근무시간 안에서 처리할 수 있어 실질적인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게 노조 측 주장이다.
금융노사는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실노동시간 단축 취지도 이번 합의에 반영했다고 밝혔다. 금융노조가 추진해온 주 4.5일제와도 맞닿아 있다. 노조는 과거 금융권의 주 5일제 도입 당시에도 고객 불편과 경쟁력 저하 우려가 있었지만 이후 주 5일제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했다며, 금융권의 노동시간 단축이 다른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윤석구 금융노조 위원장은 "건국 이래 최초의 은행 영업시간 30분 단축"이라며 "노동시간 단축과 일·생활 균형을 위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끌어냈다"고 말했다.